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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종소리
아버님께


새벽마다 저는 두 개의 종소리를 듣습니다. 새벽 4시쯤이면 어느 절에선가 범종(梵鍾)소리가 울려오고 다시 한동안이 지나면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 두 종소리는 서로 커다란 차이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종이 높고 연속적인 금속성임에 비하여, 범종은 쇠붙이 소리가 아닌 듯, 누구의 나직한 음성 같습니다. 교회종이 새벽의 정적을 휘저어놓는 틈입자(闖入者)라면, 꼭 스물아홉 맥박마다 한 번씩 울리는 범종은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의 '고'(敲)처럼, 오히려 적막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빌딩의 숲 속 철제의 높은 종탑에서 뿌리듯이 흔드는 교회 종소리가 마치 반갑지 않은 사람의 노크 같음에 비하여, 이슬이 맺힌 산사(山寺) 어디쯤에서 땅에 닿을 듯, 지심(地心)에 전하듯 울리는 범종소리는 산이 부르는 목소리라 하겠습니다. 교회 종소리의 여운 속에는 플래시를 들고 손목시계를 보며 종을 치는 수위의 바쁜 동작이 보이는가 하면, 끊일 듯 끊일 듯하는 범종의 여운 속에는 부동의 수도자가 서 있습니다.
범종소리에 이끌려 도달한 사색과 정밀(靜謐)이 교회 종소리로 유리처럼 깨어지고 나면 저는 주섬주섬 생각의 파편을 주운 다음, 제3의 전혀 엉뚱한 소리 ― 기상 나팔소리가 깨울 때까지 내쳐 자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달픈 수정(囚情)들이 잠든 새벽녘, 이 두 개의 종소리 사이에 누워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다는 것은 작지만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불제자(佛弟子)도 기독도(基督徒)도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믿는다'는 사고형식에는 도시 서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게도 사람을 믿는다거나 어떤 법칙을 믿는 등의 소위 '믿는다'는 사고양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의 믿음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인격이나 객관화된 경험에 대한 이해와 평가의 종합적 표현일 뿐 결코 '이해에 기초하지 않은 믿음'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와는 별개의 것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범종과 교회종에 대한 포폄(褒貶)이 저의 종교적 입장과는 인연이 먼 것이며 그렇다고 일시적인 호오(好惡)나 감정의 경사(傾斜)에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지금까지 저의 내부에 형성된 의식(意識)의 표출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두 개의 종소리 사이에 누워 저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을 몇 개의 종소리에 귀기울여봅니다. 외래문물의 와중에서 성장해온 저희 세대의 의식 속에는 필시 꺼야 할 이질의 종소리들이 착종(錯綜)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1977.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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