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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人道)와 예도(藝道)
아버님께


비가 내려 며칠째 시원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6월 중에는 여러 번 접견이 있어서 소식을 잘 듣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화선지와 편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동생이 접견 와서 유화구(油畵具) 일체를 넣어주었습니다. 계수님 편에 말씀 들으셔서 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저는 그동안 새로 구성된 서화반에 옮겨와서 월여(月餘)째 그림과 글씨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로서는 옛 선비들이 누리던 그 유유한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입장도 못되며, 그렇다고 자기의 모든 것을 들린 듯 바칠 만큼 예술에 대한 집념이나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의 자세가 확립되지 못하고, 아직은 어떤 애매한 가능성에 기댄 채 머뭇거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 하기에 앞서, 붓을 잡는 자세를 성실히 함으로써 먼저 뜻과 품성을 닦는, 오히려 '먼 길'을 걸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과 품성이 비로소 훌륭한 글씨와 그림을 가능하게 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도(人道)는 예도(藝道)의 장엽(長葉)을 뻗는 심근(深根)인 것을, 예도는 인도의 대하로 향하는 시내인 것을, 그리하여 최고의 예술작품은 결국 '훌륭한 인간', '훌륭한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금년도 벌써 반 넘어 7월입니다. 이 각박한 토양에도 잡초들은 여기저기, 심지어 벽돌담 꼭대기에도 그 질긴 생명의 뿌리를 박아놓고 있습니다. 역시 여름인 줄을 알겠습니다.

 

1976.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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