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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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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릇은 깨뜨렸을지라도
부모님께


지금쯤은 이삿짐 웬만큼 정돈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이사 전후의 그 엄청난 수고에 생각이 미치면 짐 한 개 나르지 못하고 이제사 편지드리기도 송구스럽습니다. 오늘은 집 수리하시겠구나, 오늘은 이삿짐 꾸리시겠구나, 오늘은 이삿짐 옮기시겠구나, 오늘은 새 집에 드시겠구나……, 며칠째 내내 마음만 천 리입니다.
부근에 석촌호수만한 아버님의 산책로 있으신지, 어머님 방에 화장실 딸려 있는지, 이것저것 궁금합니다. 리인위미(里仁爲美)란 {논어}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어지신 마음 깃든 곳이면 어느 곳이건 아름다운 거처 되리라 믿습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근심하시는 모습 눈에 선합니다. 성공은 그릇이 넘는 것이고, 실패는 그릇을 쏟는 것이라면, 성공이 넘는 물을 즐기는 도취인 데 반하여 실패는 빈 그릇 그 자체에 대한 냉정한 성찰입니다. 저는 비록 그릇을 깨뜨린 축에 듭니다만, 성공에 의해서는 대개 그 지위가 커지고, 실패에 의해서는 자주 그 사람이 커진다는 역설을 믿고 싶습니다.
"이빨은 오복에 들어도 자식은 오복에 들지 않는다" 하시던 어머님 말씀 떠오릅니다.
올 봄은 내내 볕이 없다가 겨우 볕들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황사(黃砂) 천지였습니다. 서울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곳에서는 모악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비 사막에서 이는 황진(黃塵)이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고 서해를 황해로 만들고 다시 우리 눈에까지 날아들다니.
남북 동서 문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끼리의 왜소한 내왕에 비하면 자연의 내왕은 실로 웅장합니다. 근 열흘 만에 황사 사라지고 나자 복숭아꽃 환히 만발하였습니다. 그 먼지 속에서도 햇빛을 주워담고 물을 자아올려 봉오리 키워왔었던지 복숭아꽃 흡사 아우성처럼 언덕을 흔들고 있습니다. 우이동의 새봄과 함께 아버님, 어머님의 평안하심을 빕니다.

 

1988.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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