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게 나눈 작은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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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게 나눈 작은 싸움
계수님께


징역 사는 동안 자주 목격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싸움입니다. 인제는 만성이 되어 순전한 구경꾼의 눈으로 바라보게끔 되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대끼다보면 공자와 맹자도 싸우게 됩니다.
문제는 남들에게 호락호락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성깔 사나운 사람으로 호가 나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싸워두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폭력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소위 폭력문화의 광범한 영향입니다. 이래저래 이곳에서는 엔간한 다툼은 곧잘 싸움으로까지 직진해버립니다.
그 많은 싸움들을 보고 느낀 것입니다만, 싸움은 큰 싸움이 되기 전에 잘게 나누어서 미리미리 작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 파국을 면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싸움은 잘만 관리하면 대화라는 틀 속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책(上策)은 못되고 중책(中策)에 속합니다. 상책은 역시 싸움에 잘 지는 것입니다. 강물이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원리입니다. 쉽게 지면서도 어느덧 이겨버리는 이른바 패배의 변증법을 터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기보다 어렵습니다. 마음이 유(柔)해야 하고 도리에 순(順)해야 합니다. 더구나 지면서도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우에 어긋나지 않고 떳떳해야 합니다. 경우에 어긋남이 없고 떳떳하기만 하면 조급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할 필요도 없고, 옆에서 보는 사람은 물론 이긴 듯 의기양양하던 당자까지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완벽한 승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것도 싸우지 않는 것만은 못합니다.
싸움은 첫째 싸우지 않는 것[無爭]이 상지상책(上之上策)입니다. 그 다음이 잘 지는 것[易敗], 그 다음이 작은 싸움[靜爭], 그리고 이기든 지든 큰싸움[亂爭]은 하책(下策)에 속합니다.
이것은 물론 징역살이에서 부딪히는 쓰잘 데 없는 싸움에나 통하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막상 나 자신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수님이 궁금하실 부부싸움에 관하여는 나로서는 정작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다만 맞아서 멍든 자국을 처치하는 우리들의 방법을 참고로 소개하는 것으로 싸움이야기 끝내겠습니다.
멍든 곳을 찬물찜질하거나 날계란을 둘리거나 안티플라민, 제놀스틱으로 문질러 멍을 삭히는 방법과, 대일파스를 붙이거나, 마스크를 착용하거나 모자를 눌러써서 그 부위나 얼굴을 가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멍든 마음, 멍든 '관계'를 현명하게 치유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훌륭하게 해내기만 하면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난쟁(亂爭)이 무쟁(無爭)보다 더 나을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할 것입니다. 아무튼 계수님의 건승을 빕니다.
아버님 하서에 우이동 새 집 이야기, 이태조의 [백운대] 시까지 곁들여서 자세히 적어 보내주셨습니다. 햇볕이 아쉬운 징역살이, 그나마 여러 사람들과 혼거해온 나로서는, 머지않아 북한산 삼봉(三峯)이 바라보이는 남향 방 하나 차지오겠지 하는 기대로 마음 설레입니다.
뒷산에 봄 꿩소리 들립니다. 서울에는 없는 소리입니다.

 

1988.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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