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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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의 철학
계수님께


"바깥은 저러큼 몽땅 봄인디 이 안에는 연태 겨울이당게요.""봄이 아작 담을 못 넘었나벼."
창가에서 나누는 우리들의 대화 한토막입니다. 겨울은 그리도 쉽게 옥담을 넘어들더니 봄은 더디기만 합니다.
작년 가을 특별구매 때 사서 걸어두었던 마늘을 벗기다가 느낀 일입니다. 마늘 한 통 여섯 쪽의 겨울을 넘긴 모습이 가지가지입니다. 썩어 문드러져 냄새나는 놈, 저 하나만 썩는 게 아니라 옆의 쪽까지 썩게 하는 놈이 있으며, 새들새들 시들었지만 썩기만은 완강히 거부하고 그나마 매운 맛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놈도 있으며, 폭싹 없어져버린 놈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늘 본연의 생김새와 매운 맛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흐뭇하게 하는 것은 그 속에 싹을 키우고 있는 놈입니다. 교도소의 천장 구석에 매달려 그 긴 겨울을 겪으면서도 새싹을 키워온 그 생명의 강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록빛 새싹을 입에 물고 있는 작은 마늘 한 쪽, 거기에 담긴 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봄이 아직 담을 못 넘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새 벌써 우리들의 곁에서 새로운 생명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임소장 취임사에서 '옥'(獄)자를 풀이하기를 "늑대[仇]와 개[犬] 틈새에서 말[言] 못하는 형국"이라 했습니다. 적절한 풀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여 년 이상이나 옥바라지해 온 계수님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바깥 사람들은 교도소를 그렇게 여길 것이라 짐작됩니다. 온갖 범죄와 패륜이 밀집되어 있는 곳, 한마디로 지옥 같은 곳이라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나의 생각은 그와는 좀 다른 것입니다.
무엇보다 징역살이란 최소한 의식주가 해결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곳이기 때문에 바깥 사회와 같은 치열한 생존경쟁이 없다는 기본적 특징이 있습니다. 이 기본적 특징은, 교도소에 만연된 개개인의 실의와 좌절감이 한몫 거들기도 하지만, 교도소 전체의 분위기를 상당히 누그러뜨려 놓습니다. 한편 교도소에는 갖가지 흉악하고 파렴치한 범죄인들이 모여 있어서 분위기가 살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함께 살아보면 저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범행을 저질렀을까 싶을 정도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딴판인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그의 죄명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경우바르고 얌전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이 없어지고 나면 폭력과 비리와 패륜도 흡사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무력해지고 이빨 빠진 맹수처럼 무해한 것이 되어버리는가 봅니다. 생존을 위한, 또는 치부(致富)나 허영을 위한 과도한 추구가 모든 폭력과 비리의 근거가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교도소에도 먹새를 남달리 밝히거나 신발이나 옷 등 입성에 멋을 부리려는 속칭 '잘나가는' 재소자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는 일반 재소자들의 시선은 매우 경멸적입니다. 어떠한 사회이든 대중은 다수이며 동시에 선량하고 지혜롭습니다. '잘나가는 재소자'는 전체 분위기에서 보면 이질적이며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그것은 교도소 자체의 내생적(內生的)인 것이 아니라 외래적인 수입물이라 해야 옳습니다. 높은 담장으로 사회와 철저히 격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단한 입소(入所)와 출소(出所)에 의하여 바깥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음으로써 나타나는 사회의 분비물로 파악되어야 할 것입니다. 굳이 재소자의 비리를 들라면 그것은 "향토예비군복 입으면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남의 밭에서 무 뽑아 먹는" 그런 유(類)의 것으로서 청의삭발에 연유한 일정한 자비감(自卑感)과 위악(僞惡), 그 이상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교도소가 아무리 의식주가 보장되고 치열한 경쟁의식이 배제된 곳이라 하더라도 여기가 살만한 곳이 못됨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도소에는 그 특유의 음침한 응달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전반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출소하기만 하면 만사 해결될 것 같은 환상이 각자의 성장의 가능성과 의지를 잠재워버리는, 일종의 종교적 문화가 만연해 있는가 하면, 우리를 한없이 움츠리게 하는 수많은 규칙이 있으며, 노동의 자세를 왜곡하고 노동의 의의를 흐리게 하는 징역이 있는가 하면, 긍지는커녕 작은 기쁨도 허락치 않는 부단한 경멸과 혐오와 반성의 강요가 있습니다.
요컨대 교도소는 지옥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천국일리도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도소가 '밑바닥'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회의 밑바닥, 어떤 시대, 어떤 역사, 어떤 인간의 밑바닥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낮고 어두운 밑바닥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기에 걸맞는 '철학'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비단 징역살이에 한한 문제만은 아니라 생각됩니다만 특히 징역살이에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가장 낮은 밑바닥에 세우는 냉정한 시선과 용기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시선과 자신에 대한 용기만이 자기가 선 자리를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서 위치규정할 수 있게끔 대자적(對自的) 인식을 정립해주는 동시에 징역 세월 동안 무엇을 배우고 무엇에 물들지 말아야 하는가를 가릴 수 있게끔 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곧 막힌 벽으로부터 시선을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이 하늘이고 밥이 하늘이고 밑바닥이 하늘"이라던 그 녹두의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 그 넉넉한 마음이야말로 사회와 시대와 역사와 인간의 진실을 향하는 한 줄기의 '양심'이며, 봄도 더디 넘는 옥담 속에서 겨우내 눈록빛 새싹을 키우는 매운 '예지'라 믿습니다.

 

1987.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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