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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의 벽두


바깥에서는 70년대의 대망(大望)에 모두들 가슴이 부풀고 희망찬 설계가 한창인 모양이지만 감옥에 갇혀 앉아 있는 내게는 고속도로도, 백화점도, 휴일도, 연말도, 보너스도, 친구도 없이 쇠창살이 질러 있는 창문 하나만 저만치 벽을 열어주고 있을 뿐이다.
전망이 없는 이 창문을 향하여 나는 나의 가족과 나의 사랑과 나의 청년을 읽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70년대는 이 창문에서부터 밝아왔다.
아침 6시 기상 나팔이 불면 잠에서 깬다. 혹 꿈에서 깰 적도 있다.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상 30분 전쯤에 깨어서 천장을 보거나 벽에 걸린 옷이나 방구석의 책, 신발들을 둘러보면서 여기가 감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는데 요즈음은 나팔이 불어야 깬다. 아마 일광욕 시간에 축구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상 나팔소리보다 조금 일찍 깨어나는 편이 덜 고달프지만 그게 요즈음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침 6시 나팔소리에 잠에서 깬다. 나른한 몸을 따뜻한 모포 속으로부터 선뜻 빼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으면 관무와 형모가 먼저 일어난다. 이들이 옷을 거의 입을 때쯤 그제야 나는 머리맡의 마스크를 집어서 쓰고 일어나 앉아 양말, 덧버선, 바지의 순서로 챙겨 입는다. 내가 옷을 입는 동안 관무, 형모, 그리고 헌우 셋이서 침구를 갠다.
방을 한 번 쓸고 매트리스를 깔고 그 위에 모포를 펴서 자리를 만들어놓으면 나는 방 안쪽 구석에서 맨손체조를 하거나 식구통에 매달려 팔다리 굽히기 운동을 하고 나서 제일 구석 자리인 내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대개 앉은 채로 조끼(수길이가 출감기념으로 주고 간 것으로 야전잠바의 내피에 지퍼를 달아서 만든 것)와 잠바를 입는다. 이때쯤 복도에는 후앙(환기장치) 돌아가는 소리가 윙윙거리는 가운데 동청소반장의 욕지거리가 들린다. "이 새끼들, 변소 나오지 마!" "씨발놈들아, 웅성거리지 마라!" "난롯가에 섰는 놈들은 통뼈야?" 하루의 일과가 어김없이 이런 욕설에서부터 시작된다. 후앙소리가 그치고 이내 "점호 5분 전!"을 알리는 동필기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중앙'에서부터 점호보고가 들려오고 각 호실의 번호소리가 들리면서 점점 8호 감방 쪽으로 옮겨온다. 드디어 "8호 13명 번홋!" 구령이 떨어지면 1호실에서부터 번호를 부른다. "한, 둘, 세, 네, 다, 여, 곱, 들, 홉, 열……." 나는 대개 '넷'을 부른다.
점호를 취하러 오는 근무 헌병이나 동대기 선임하사는 감방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이 그저 '대가리 숫자'만 맞으면 그만이다. 점호가 지나가면 또 모포를 쓰고 드러눕는다. 매트리스를 깔고 앉거나 모포를 뒤집어쓰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1동 8호를 제외한 다른 감방에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8호는 사형수, 무기수들이 웅치고 있어서 근무자들이 감히 간섭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 영광스러운(?) 전통이 수립되기까지 겪은 투쟁사는 실로 굉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8호 총원들은 대개 세면시간까지 다시 취침을 하시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이 시간에 책을 읽는다. 요즈음은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읽는다. 읽을 만한 책이 귀하여 읽는다기보다 거의 외우다시피 읽고 또 읽는다.
그런데 약 일주일 전부터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이 시간에 찾아온다. "안녕하십니까? 예배시간입니다." 어제 공부한 것을 복습하고 성경구절을 봉독하고 설교,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약 5분에 끝난다.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도 또 아침마다 '전도'를 보내서 예배를 보게 하는 까닭은 아마 사형 집행이 확실시되는 '김○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예배를 귀찮아하지만 그래도 이 '전도'의 말씨가 지극히 공손하고(이 '전도'도 수감자의 한 사람이다) "얼마나 추우십니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등의 살뜰한 말씨는 다른 사람한테서는 결코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지극히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예배가 끝날 무렵이면 다른 호의 세면 및 용변이 끝나고 8호 차례가 된다. 8호 총원이 세면장이나 변소에 나올 때 다른 호의 인원이 얼렁거리다간 '쥐어터진다'. 그래서 8호 문 따면 다른 호의 인원은 자취를 감춘다. 갇혔던 짐승들이 우리에서 풀려나오듯 우글우글 세면장으로 나가면 우리들을 보는 시선도 그렇고 우리 스스로도 짐승같이 여겨진다. 걸음걸이도 일부러 어슬렁어슬렁거린다. 내가 복도에 나오는 때는 인사하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다. 근무 헌병으로부터 교도, 동청소반장, 수품계, 동필기, 배식반장 등 소위 열외급(列外級) 통뼈들이 더러는 진심에서, 더러는 '8호 실장님'에 대한 정치(?)로 '사이사이'(아첨)를 놓는다.
나는 세면과 용변이 끝나면 난롯가에 앉는 법이 없이 곧장 감방에 들어앉는다. 그리고 8호의 다른 방에 있는 김태일랑과 박상은의 영어공부를 도와준다. 문을 따놓은 동안이라야 지척이라도 내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밥이 들어오면 각 방으로 다시 어슬렁거리며 들어가서 아침식사를 한다. 김치찌개가 겨울 추위를 달래주는 유일한 메뉴이다. 8호에서나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김치에 고추장, 버터, 간장, 때로는 콩나물까지 국에서 건져넣어 난로에 끓인 것이다. '국도 아닌 것이, 찌개도 아닌 것이'다.
식사 마치고 숭늉(누룽지를 넣고 주전자에 끓인 것)까지 마신 날이면 배고프지 않는 도야지들의 행복(?)이 복부에 묵직하다. 식사 중이나 식사 후에도 나는 많은 사람의 인사를 받는 셈이다. 1동 입구의 1호에 있는 장기수, 때로는 7동의 45호 장기수, 사형수들까지 놀러(?)와서 잠깐 보고 간다. 불행은 불행끼리 위로가 된다.
식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을 채운다. 아침 세면 때부터 식사 후 문을 잠글 때까지의 시간은 약 1시간, 길어야 1시간 30분이며, 이것은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세 번 거의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오전에 내가 하는 일은 주로 책을 읽는 일이다. 오후에는 점심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곧 일광욕 나갈 준비를 한다. 진눈깨비가 슬슬 뿌리는, 일광이 없는 날에도 악착같이 일광욕을 하겠다고 우겨댄다. 모포를 짊어지고 일렬로 야외동 운동장으로 나간다. 요즈음은 거의 축구로 시간을 다 채운다.
운동장이래야 보통 운동장의 1/3 정도 크기밖에 안되지만 1시 30분에서 2시까지 제한된 일광욕 시간을 대개 20∼30분 초과해서 '더 찾아먹는다'. 8호의 장기수들끼리 편을 갈라 1 2호실(6명) 대 3 4호실(7명)의 시합이다. 과자 한 봉, 또는 미원 한 봉 내기를 한다. 대개 우리편(1 2호)이 이긴다. 가끔 다른 호 인원과 시합하는 경우도 있다.
일광욕이 끝나면 세면장에서 세면, 냉수마찰을 하고, 다시 문을 걸어잠그고 들어앉는다. 축구시합의 품평회를 벌이듯 식구통에 달라붙어서 2, 30분 떠들썩하다. 책을 손에 들거나, 형모와 관무가 다리 주물러주며 꼬시는 데 넘어가 이야기를 하거나, 세 사람에게 영어 수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과자가 있으면 빼먹기 놀이(올 마이티)도 하며, 오전보다는 각 방마다 다소 활기를 띤다. 일광욕, 이것은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유일한 낙이다. 오후 시간은 이 일광욕으로 시작해서 그 뒤풀이로 떠들다가 저녁밥을 맞는 셈이다.
저녁식사가 오면 또 찌개를 만드느라, 변기통을 비우느라, 세탁을 하느라, 변소엘 가느라, 문 따놓은 동안에 할 일도 많고, 일 없이도 우글우글 모여 다닌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다시 문 잠그고 들어앉는다.
최근에 내가 보고 있는 책은 {Analytic Geometry and Calculus}, {난중일기}, {네루의 옥중서간집} 등이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도 한 번씩 읽은 책이지만 책이란 자기가(독자가) 변하면 내용도 변하는지 다른 느낌을 받는다. 8호 감방은 낮이나 밤이나 같은 조명이지만 저녁시간이 더 아늑하다. 이것은 이제 밤을 기다린다는 가라앉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저녁식사 후부터 취침 때까지 수감자들이 치러야 하는 공식적인 행사(?)는 동인원 파악과 취침점호 두 가지인데 이것은 아침 기상 후의 점호와 마찬가지로 그저 '대가리 수'를 세어보는 것이다. 다른 호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수십 번 인원파악을 하는데도, 8호는 항상 열쇠를 채워두고, 또 작업출동(作業出棟)이 없기 때문에 하루에 세 번밖에 점호를 하지 않는다. 아침점호, 취침점호, 그리고 취침점호 20∼30분 전에 실시하는 동인원 파악의 세 번뿐이다. 저녁 취침점호가 끝나면 잠자리를 편다. 출입문을 옆으로 두고 문 쪽으로부터 헌우, 나, 관무, 형모의 순서로 나란히 눕는다. 1호실의 식구도 그동안 참 많이 바뀌었다. 많을 때는 8, 9명까지 북적대기도 하다가 한동안은 나 혼자 이 어두운 공간을 다 짊어지고 앉아 있기도 하였다.
대부분은 형이 확정되어 민간교도소로 이송가기도 하였고 또 개중에는 원심이 파기되어 사단군법회의로 환송되어 사단 영창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고, 예비사단으로 가서 사형 집행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단촐한 네 식구다. 우리가 덮는 이불은 모포임은 물론이다. 솜이불이 그립지만 군대에 이불이 있을 리 없다. 군용담요를 두 장 연결하였기 때문에 네 명이 한 이불을 덮는다. 이것은 담요 다섯 겹이기 때문에 거의 추운 줄을 모른다. 밑에는 매트리스 위에 또 담요 두 장을 깐다. 우리는 대개 잠자리에 들면 30분 정도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버릇이 있는데 나는 금세 곯아떨어지는 잠꾸러기이다. 다른 녀석들처럼 낮잠을 자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취침 나팔이 밤하늘을 울리면 수감자들은 습관처럼 고향을, 부모를, 바깥을 상상해본다. 꿈에나마 그리운 곳, 그리운 사람을 만나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이 시간이 하루의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생각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불 속에 발뻗고 편안히 누웠기 때문이며 고달픈 하루가 지나갔다는 이른바 '세월'을 보낸 느낌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리하여 이튿날 아침 기상 나팔이 불면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시작되며 또 똑같은 내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나날의 반복 속에서 수감자들은 모든 동작과 사고가 기계처럼 습관화되어버린다. 더구나 이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는 6각(六角)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을 중심으로 6개의 긴 사동(舍棟)이 6개의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6개 사동 중의 어느 사동도 동 서 남 북의 정방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한마디로 이 6각 속에서는 어느새 방향감각이 흐려진다. 이 점을 노려 계획된 설계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서남북 중의 어느 하나도 확실하게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게 되고 만다. 이러한 방향감각의 상실에다 기계처럼 단조롭고 습관화된 나날들, 실로 힘든 하루하루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인가 새로운 의욕과 창의, 이런 것들이 무척 아쉬워지며,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형생활의 내면이고, 다른 한편 수형생활이 단조롭고 무료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이 좌절된 위치에서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하려는 아귀다툼과 투쟁, 응어리진 불만과 불신과 분노가 빽빽이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밥이 왔는데 왜 개새끼 근무자는 문을 안 따나!"에서부터 시작하여 국에 왕건이(건더기)가 없다, "국 당번 나와!" 배식반장을 끌고 와서 "이 새끼, 김치가 왜 이렇게 적어!" 주먹으로 조지고 발로 까는가 하면 "수품계 새끼! 비누가 100% 안 나왔다", "다른 호에 50% 나왔다고 이 새끼야, 8호에도 50%를 줘?" "세수도 않고 총 맞으란 말이야?" "당장 100% 안 가져왔다간 깨지는 줄로 알아!", "난로 당번 한탕 시키자, 이 새끼 요즘 좀 삐딱해. 식사시간인 줄 뻔히 알면서 탄을 갈아넣어?" "찌개도 물도 못 끓이게 곤조부리는 거야?"…… "×나게 까!" …… 하루에도 수십 번 "8호 당번 나와라!" 문을 쾅쾅 차며 물 가져오라, 수건 좀 적셔오라, 양말 말려오라, 동내의 세탁 좀 하자, 백지 구해오너라, 버터에 건빵 좀 볶아오너라, 장기판 만들게 마분지 어디서 좀 뺏어오너라, 어디 있는지 말만 해! 내가 가서 뺏어올 테니까, 설사 환자 있으니 문 좀 따! 근무자가 없어? 근무자 나오시오! ……, …….
어쩌면 사형수는 물론이고 장기수들은 모두 인생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누구보다도 약하고 서러운 자이기 때문에 그 표현이 치열하고 극성인지도 모른다.
괴롭고 서글픈 하루의 마지막을 알리는 취침 나팔소리마저 자지러지고 나면 이 8호 감방에도 이윽고 무덤 속 같은 정적이 찾아든다. 가끔 악몽에 시달리는 잠꼬대가 이 정적을 깨뜨리기도 하지만 내일 아침 기상 나팔소리가 칼끝같이 이 정적을 쪼갤 때까지 여기 이 감방은 그대로 하나의 무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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