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흙에 새 솔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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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형수님께


몇 장의 깨끗하게 쓰지 못한 공책장을 찢어내면, 그만큼의 새 공책장도 따라 떨어져 나갑니다.
결벽증이 심하고, 많은 것을 원하던 학생 시절에는 노트의 첫 장이 조금이라도 더렵혀지면 이내 뜯어내고 새로 시작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지간히 세월도 흐르고 세상의 너른 속을 조금은 겪어서 그런지, 새 공책장이 떨어져 나갈까봐, 또는 애써 쓴 몇 장의 공책장이 아까워서도 차마 더럽혀진 노트를 선뜻 뜯어내지 못하고 웬만하면 그냥 두는 쪽을 택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깨끗이 쓰지 못한 공책장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그 나름의 수고에 오히려 애착이 가고 연분마저 느끼게 되어 이제는 결백하나 얄팍한 노트보다는 다소 지저분하더라도 두툼한 노트를 갖고 싶은 마음입니다.
한 송이의 작은 봄꽃을 위하여 냉혹한 겨울의 중량을 인동(忍冬)하는 풀싹이나, 단 한 사람의 신뢰를 위하여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는 우정의 이야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개인으로서의 자기를 뛰어넘게 하는 귀중한 깨달음을 갖게 합니다.
열다섯 해는 아무리 큰 상처라도 아물기에 충분한 세월입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을 시종 자신의 상처 하나 다스리기에 급급하였다면, 그것은 과거 쪽에 너무 많은 것을 할애함으로써 야기된 거대한 상실임이 분명합니다. 세월은 다만 물처럼 애증을 묽게 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동산의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 것' 또한 세월의 소이(所以)입니다.
오늘은 올 들어 제일 더운 날씨입니다. 가내 평안을 빕니다.

 

 

1982.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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