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파도를 만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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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파도를 만나듯
아버님께


5월 11일부 하서 진작 받고도 이제서야 필을 들었습니다. 그간 어머님께서도 강녕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시리라 믿습니다. 이곳의 저희들도 몸 성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왔던 더위도 윤사월을 비켜 잠시 뒤물림을 했는지 조석으로 접하는 바람에는 상금도 초봄의 다사로움이 남아 있습니다.
고요히 앉아 아무 일 않아도 봄은 오고 풀잎은 저절로 자란다는 선승의 유유자적한 달관도 없지 않습니다만, 저만치 뜨거운 염천 아래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운 일터를 두고도 창백한 손으로 한갖되이 방안에 앉아 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징역의 소치라 하더라도 결국 거대한 소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새의 울음소리가 그 이전의 정적 없이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저는 이 범상히 넘길 수 없는 소외의 시절을, 오거서(五車書)의 지식이나, 이미 문제에서 화제의 차원으로 떨어진 철늦은 경험들의 취집(聚集)에 머물지 않고, 이러한 것들을 싸안고 훌쩍 뛰어넘는 이른바 '전인적 체득'과 '양묵'(養默)에 마음 바치고 싶습니다.
팽이가 가장 꼿꼿이 선 때를 일컬어 졸고 있다고 하며, 시냇물이 담(潭)을 이루어 멎을 때 문득 소리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선한 것을 향하여 부단히 마음을 열어두는 내성(內省)과 공감의 고요함인 동시에 자기 개조의 숨가쁜 쟁투(爭鬪)와 역동을 속 깊이 담고 있음이라 생각됩니다. 알프스에서 바람을, 성하(盛夏)에 신록을, 그리고 바다에서 이랑 높은 파도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 하나 거스르지 않는 합자연(合自然)의 순리라 믿습니다.
보내주신 화선지는 옥'당'지(玉唐紙)가 아니고 왕당지(王堂紙)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상급품이긴 하지만 옥당지보다 얇아서 편액을 쓰기에는 적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는 옥당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1982.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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