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일깨우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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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일깨우는 소리
계수님께


변전기가 고장이 나서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불꺼진 방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 오히려 낯설어 늦도록 깨어 있으니 불 켜 있던 밤에는 미처 듣지 못하던 여러 가지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멀리 누군가의 고향으로 달리는 긴 밤열차로부터 담 너머 언덕에서 뛰노는 동네 아이들 소리, 교도소의 수많은 쥐들을 전율케 하는 고양이의 앙칼진 울음소리, 가지를 흔들어 긴 겨울잠에서 뿌리를 깨우는 봄바람 소리, 그리고 상처받은 청춘을, 하루의 징역을 고달파하다 잠든 젊은 재소자들의 곤한 숨소리……. 어둠 속의 담뱃불처럼 또렷이 돋아납니다.
어둠은 새로운 소리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놀랍게도 나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어둠은 나 자신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캐어물으며 흡사 피사체를 좇는 탐조등처럼 나 자신을 선연히 드러내주었습니다. 교도소의 응달이 우리 시대의 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주듯 하룻밤의 어둠이 내게 안겨준 경험은 찬물처럼 정신 번쩍 드는 교훈이었습니다.
새벽녘이 되자, 지금껏 방안의 불빛과 싸우느라 더디게 더디게 오던 새벽이 성큼성큼 다가와 훨씬 이르게 창문을 밝혀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제 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는 법이지만 어제와 오늘의 중간에 '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큼직한 가능성, 하나의 희망을 마련해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이백(李白)은 호지(胡地)에 꽃나무가 없어서 봄이 와도 봄답지 않다고 하였지만 이곳에서 느끼는 불사춘(不似春)은 봄을 불러세울 풀 한 포기 서지 못하는 척박한 땅 때문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우리와 우리 이웃들의 헝클어진 생활 속 깊숙히 찾아와서 다듬고 여미고 북돋우는 그런 봄이 아니면 '4월도 껍데기'일 뿐 진정한 봄은 못되는 것입니다.

 

 

198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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