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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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껍질
아버님께


새벽에 눈뜨면 시간을 어림하기 위하여 먼저 창문을 올려다봅니다. 방에 불이 켜 있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드러난 쇠격자 사이로 짙은 먹빛 유리창에 미명(微明)의 푸른 빛이 엷게 배어나기 시작하면 새벽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을날 새벽이 자라고 있는 창 밑에서 저희는 이따금 책장을 덮고 추상(秋霜)같이 엄정한 사색으로 자신을 다듬어가고자 합니다. 영위하는 일상사와 지닌 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자연 생각이 공허해지게 마련이며 공허한 생각은 또한 일을 당함에 소용에 닿지 못하여 한낱 사변일 뿐이라 믿습니다. 저희들이 스스로를 통찰함에 특히 통렬해야 함이 바로 이런 것인즉, 속빈 생각의 껍질을 흡사 무엇인 양 챙겨두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문자를 구하는 지혜가 올바른 것이 못됨은, 학지어행(學止於行), 모든 배움은 행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함으로써 비로소 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항시 당면의 과제에 맥락을 잇되, 오늘의 일감 속에다 온 생각을 가두어두지 않고 아울러 내일의 소임을 향하여 부단히 생각을 열어나가야 함이 또한 쉽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내일 모레가 상강(霜降). 가을도 차츰 겨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기체안강(氣體安康)하시길 빕니다. 이곳의 저희들도 얼마 남지 않은 가을 동안에 겨울을 견딜 건강을 갈무리해두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198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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