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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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과 보냄
계수님께


우리가 사는 2사(舍) 26방(房)은 오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도 만기자 한 사람 떠나갔습니다. "건강하시오", "성공하시오", "다시는 이곳에서 만나지 맙시다." 우리는 이런 말로 간단히 헤어집니다. 집도 절도 없이 객지로 타관 살러 가듯 떠나는 사람, 내일 저녁은 '치마 걸린 온돌방'에서 잘 사람……. 한 손엔 식기 3개 또 한 손엔 징역보따리 달랑 한 개 들고 어느날 저녁 갑자기 전방 가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전방 간 사람과 비슷한 세간을 들고 죄진 사람처럼 머뭇거리며 전방 오는 사람을 맞기도 합니다. 닫힌 방은 떠나고 새로 드는 사람들로 하여 잠시 열리는 공간이 됩니다.
빈약한 동거의 어느 어중간한 중도막에서, 바깥 사람이라면 별리(別離)의 정한(情恨)이 자리했을 빈터에,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서로 어떠한 '관계'를 뜨개질해왔던가? 하는 담담한 자성(自省)의 물음을 간추리게 됩니다. 슬픔에 커진 눈으로, 궁핍에 솟은 어깨로, 때로는 욕탕의 적나라함으로, 때로는 멀쩡하게 발톱 숨긴 저의(底意)로, 한 몸 인생이 무거워 짐 추스리며, 몸 부대끼며 살아온 이 팔레트 위의 우연 같은 혼거(混居)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과연 무엇이 되어서 헤어지는지…….
숱한 사연과 곡절로 점철된 내밀한 인생을 모른 채, 단 하나의 상처에만 렌즈를 고정하여 줄곧 국부(局部)만을 확대하는 춘화적(春畵的) 발상이 어안(魚眼)처럼 우리를 왜곡하지만 수많은 봉별(逢別)을 담담히 겪어오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묵직한 체험을 함께 나누는 견실함을 신뢰하며,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일찍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에 사는 행복감을 감사하며, '세상의 슬픔에 자기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
다시 만나지 말자며 묵은 사람이 떠나고 나면 자기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체험을 등에 지고 새 사람이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의 친구들이 죽어서, 나는 다른 친구를 사귀었노라. 용서를 바란다. 모블랑의 시는 차라리 질긴 슬픔입니다.
벌써 11월 중순. 바람과 함께 창 옆에 서면, 저만치 높은 전신주가 겨울을 부르고 있습니다.

 

 

1980.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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