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랑의 물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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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의 물가에서
아버님께


어머님께서도 안녕하시고 가내 두루 무고하실 줄 믿습니다. 저희들도 별고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벌써 10월 중순, 첫 매가 아프듯 첫 추위가 시리다고 합니다만 그것도 처음 겪는 이들의 걱정일 뿐 저희들은 누년(累年)의 체험이 있겠다, 그리 대수로울 것 없습니다.
저는 낮으로는 줄곧 공장수(工場囚)들이 출역하고 난 빈 방에 건너와서 종일 붓글씨를 쓰며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방은 저희들이 있는 방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몸때 얼룩진 벽에는 고달픈 보따리들을 올망졸망 매달아두었고 방 한쪽 구석에는 간밤의 체온이 밴 침구가 반듯이 개여 식고 있습니다. 저는 이 방의 주인들이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들어올 때까지 이 작은 공간의 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방(空房)의 정밀(靜謐)은 정토(淨土)의 청정(淸淨) 같은 것. 어느 때 창랑(滄浪)의 물처럼 마음이 맑아지면 심혼(心魂)은 다시 갓끈을 씻으려 할 것인가. 생각은 공방을 다 메울 듯합니다.
옥죄이는 징역살이 속에서 이나마 조용한 시공(時空)을 점유한다는 것은 흡사 옥담 위의 풀처럼 '귀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혼자라는 것이 결코 사람의 처소가 아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숱한 사람들의 은원(恩怨) 속 격려와 지탄과 애정과 증오의 와중에서 비로소 바르게 서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천수고 불감불국(天雖高 不敢不局), 하늘이 비록 높아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으며, 막견어은 막현어미(莫見於隱 莫顯於微), 아무리 육중한 벽으로 위요(圍繞)된 자리라 하더라도 더 높은 시점에 오르고 더 긴 세월이 흐르면 그도 일식(日食)처럼 만인이 보고 있는 자리인 것을……. 저에게 주어진 이 작은 일우(一隅)가 비록 사면의 벽에 의하여 밀폐됨으로써 얻어진 공간이지만, 저는 부단한 성찰과 자기부정의 노력으로 이 닫힌 공간을 무한히 열리는 공간으로 만들어감으로써 벽을 침묵의 교사로 삼으려 합니다. 필신기독(必愼其獨), 혼자일수록 더 어려운 생각이 듭니다.

 

1977.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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