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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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얼굴
아버님께


우송해주신 책과 돈 잘 받았습니다. 동봉하셨으리라고 여겨지는 하서는 오늘쯤 서신 검열이 끝나는 대로 받게 될 듯합니다.
그간 어머님을 비롯하여 가내 모두 평안하실 줄 믿습니다. 저도 몸 성히 잘 있습니다. 계수님이 매월 잊지 않고 송금해주고 있어서 약도 사고 책도 몇 권 구입하여, 저는 비교적 넉넉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보내주신 책 세 권은 전번에 우송해주신 근대경제사 관계의 책과 마찬가지로, 주로 이조 후기 사회에 관한 논문들로서 그간 제가 접해온 의병 관계자료들에 대하여 일정한 사회경제적 토대를 제공해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특정기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과 계통적인 독서는(물론 정강이 위에 책 한 권 달랑 얹어놓고 따르르 읽어내리는, 그리고 시루에 물 빠지듯 쉬이 잊어버리는 징역 속의 현실과는 아예 인연이 먼 이야기이지만) 대부분의 독서가 실족(失足)하기 쉬운 그 파편성, 현학성을 제거해준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이조 후기 사회에 대한 부쩍 높아진 사학계의 관심은 이조 후기가 ― 이조 초기의 군강(君强) 개창(開創)의 시기나, 중기의 신강(臣强) 당쟁(黨爭)의 시기와는 달리 ― 민중이 무대 복판으로 성큼 걸어나오는 이른바 민강(民强) 민란의 시기로서 종래의 왕조사를 지양하고 민중사를 정립하려는 이들에게 이 시기는 대문(大門) 같은 뜻을 갖기 때문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토지}의 평사리 농민들, 재인(才人) 마을의 길산(吉山), {들불}의 여삼 등 이 시대를 살던 민중들의 얼굴을 찾아내려는 일련의 작가적 노력들이 경주되기도 하는 듯합니다.
작가 자신의 역량과 역사인식의 차이가 반영된 각각 다른 표정의 얼굴들이 제시되고 있음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이 시대의 연장선상 멀지 않은 곳에 가혹한 식민지 시대를 앞두고 있었던 우리의 역사를 안다면 민중의 표정이 결코 여일(如一)할 수 없음도 무리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1977.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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