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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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체온
계수님께


수인들은 늘 벽을 만납니다.
통근길의 시민이 'stop'을 만나듯, 사슴이 엽사를 만나듯, 수인들은 징역의 도처에서 늘 벽을 만나고 있습니다. 가련한 자유의 시간인 꿈속에서마저 벽을 만나고 마는 것입니다. 무수한 벽과 벽 사이, 운신도 어려운 각진 공간에서 우리는 부단히 사고의 벽을 헐고자 합니다. 생각의 지붕을 벗고자 합니다. 흉회쇄락(胸懷灑落), 광풍제월(光風霽月). 그리하여 이윽고 '광야의 목소리'를, 달처럼 둥근 마음을 기르고 싶은 것입니다.
아버님 서한에 육년래(六年來)의 혹한(酷寒)이라고 하였습니다만 그런 추위를 실감치 않았음은 웬일일까. 심동(深冬)의 빙한(氷寒), 온기 한 점 없는 냉방에서 우리를 덮어준 것은 동료들의 체온이었습니다. 추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체온을 모으는 동안 우리는 냉방이 가르치는 '벗'의 의미를, 겨울이 가르치는 '이웃의 체온'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해가는 것입니다.
이제 입춘도 지나고 머지않아 강물이 풀리고 다사로운 춘풍에 이른 꽃들이 필 무렵, 겨우내 우리의 몸 속에 심어둔 이웃들의 체온이 송이송이 빛나는 꽃들로 피어날는지……. 인정은 꽃들의 웃음소리.
구정 때 보낸 편지와 영치금 잘 받았습니다. 염려하는 사람이 한 사람 더 늘었다는 기쁨은 흡사 소년들의 그것처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보이고 싶고…….
제수와 시숙의 사이가 '어려운 관계'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시대의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현재로서는 물론, 동생을 가운데 둔 관계이며 '생활의 공유'를 기초로 하지 않은, 또 그만큼 인간적 이해가 부족한 관계라는 사실을 없는 듯 덮어두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차피 가족의 일원으로서 생활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장래의 유대를 미리 가불하기도 하고, 또 편지를 쓰면 '소식의 공유'쯤 당장부터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어려운 관계'의 그 어려움이 차차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서로의 건투를 빕니다.

 

1976.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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