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건필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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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건필을 기원하며
아버님께


사명당 관계자료를 정리 집필하고 계신다는 아버님의 편지는 저에게 여간 자랑스럽고 흐뭇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그 원고가 한 권의 훌륭한 책으로 출판되기 원할 뿐 아니라 저도 그 작업과정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더욱이 지금처럼 불효한 처지에 있는 제가 조금이나마 아버님을 도울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참가의 의의를 넘어서) 제게 참으로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며칠 곰곰이 생각에 젖어보고 다음과 같은 참여방법을 생각해내었습니다. 첫째, 그 책의 제호(題號)를 제가 써드렸으면 하는 것입니다. 제호에 관한 이야기라면 저는 우선 아버님의 전번 저서인 {발음사전}의 제호를 제가 썼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발음사전}의 제호가 썩 훌륭하다든가 또는 무슨 연고권이나 그때의 공로(?)에 은근히 기대어보자는 심사가 전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덜 솔직한 태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이러한 과거의 일보다, 그때보다 조금은 더 필체가 유려해졌고, 조금은 더 안목이 높아졌다는 현재의 사실을 고려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심정입니다.
둘째, 아버님의 원고를 제가 일독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님의 글 속에 혹시 사회과학적 논리가 일실(逸失)된 곳이 있지 않는가, 그래서 논리의 비약이나, 근거가 충분치 못한 결론이나, 꼭 필요한 분석이 행하여지지 않고 있는 곳이나, 반대로 논지에서 벗어난 논의가 한동안 계속되는 곳이 있지 않는가 등등을 살펴봄으로써 논리의 골격이 좀더 반듯하도록 보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소 지엽적인 문제이긴 합니다만 제 생각에 아버님의 문장은 대체로 너무 길고, 표현이 늘 직설적이고, 속도가 지나치게 완만한 경향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이런 점들도 아울러 퇴고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마음이 쓰이는 곳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제호의 서체나, 논리의 곡직(曲直)이나 표현상의 기교에 앞서 아버님의 소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방법의 문제입니다. 이곳의 좁은 지면으로서는 아예 논의하지 않음만 못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버님의 탈고 이전에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인물의 경우도 포함하여)은 그것만을 따로 떼어 고립적으로 인식할 때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여하한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① 어떠한 계기에서 발생하였으며 ②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하다가 ③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갔는가 하는 역사적 관계 내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동시에 또 그것을 당시의 사회구조, 당시의 가치 규준에 조응시켜 당시의 사회구조가 갖는 필연적 한계를 늘 그것의 인식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사명당에 대하여 거의 상식적인 견해마저 허술한 제가 무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만, 적어도 사명당의 우국적 면모나 종교적 근엄성 때문에 그의 사적 및 사회적 한계나 그 단소(短所)가 간과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저의 간절한 생각과는 관계없이) 과연 제가 어떤 형식으로 또 어느 정도로 아버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는지 거의 알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아버님의 건필을 기원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197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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