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고뇌와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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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본『엽서』서문
우리 시대의 고뇌와 양심


20년의 옥고를 치르고 우리들 앞에 나타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출판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을 때 그의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정신의 영역에 대하여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 긴 암묵의 세월을 견디게 하고 지탱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의 20년과 비교한 우리들 20년은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스스로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엽서들의 초고를 보았을 때의 충격이었다. 작은 엽서 속에 한자 한자 또박또박 박아 쓴 글씨는 그가 인고해온 힘든 하루하루인 듯 그 글을 결코 범상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엽서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단지 그의 아픔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고뇌와 양심이었다는 사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의 양심과 고뇌를 나누어 받는 심정으로 그의 엽서를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두 장 가진 친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복사해서 여러 장 가지고 간 친구도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이렇게 한두 장씩 나누어 가져갈 것이 아니라 원본은 본인에게 돌려주고 우리는 이 엽서의 영인본을 만들어 한 권씩 나누어 가졌으면 어떨까.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영인본의 출판계획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출판된 직후 일찌감치 의견이 모아졌었다. 그러나 저자가 내키지 않아 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금껏 미루어오다가 이제 여러 친구들이 뜻을 모아 만들어내게 되었다. 영인본을 만들면서 가장 먼저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되도록이면 초고와 똑같이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고뇌와 양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서는 듯하고, 또 엽서의 초고를 갖자는 것이 애초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관하고 있는 엽서를 전부 싣지는 못하였지만 그와 상의하여 230장 가량을 뽑아서 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리지 않은 편지와 글들을 싣게 된 것은 비단 우리들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된다. 특히 지금은 없어졌지만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휴지에다 깨알같이 박아 쓴 그의 사색노트를 함께 실었다. 이 노트는 저자가 출소한 뒤에야 집에서 발견된 것으로 당시 남한산성에서 근무한 어느 헌병의 친절이 아니었더라면 영영 없어져버렸을 그의 20대의 사색의 편린이다. 그리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독자들이 궁금해하던 76년 이전의 편지도 마침 이삿짐을 챙기다가 발견되어 함께 싣게 되어 그의 20대와 30대 초반의 사색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인본은 그의 편지 군데군데에 들어 있는 그림들도 고스란히 살려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옥중에서 어렵사리 그려두었던 삽화들도 영인본이 아니면 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제대로 무엇을 갖추어 그린 그림도 아니고 그래서 서투르기 짝이 없는 삽화들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또 다른 면모를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은 연월일의 순서로 편집하였다. 1969년부터 1988년까지의 기간이다. 20년 동안의 기록이 거의 망라된 셈이다.

문득문득 생각나기는 했지만 친구를 감옥 속에 보내고, 아니 어두운 망각 속에 묻고 나서 우리는 20년이란 세월 동안 그가 어떤 잠을 잤는지 무슨 밥을 먹었는지 어떤 고통을 부둥켜안고 씨름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어둠 속의 유일한 공간이던 엽서와 그리고 그 작은 엽서를 천근의 무게로 만드는 깨알같은 글씨들을 마주했을 때의 감회는 실로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그 작은 엽서는 바쁘고 경황없이 살아온 우리들의 정수리를 찌르는 뼈아픈 일침이면서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게 하는 자기성찰의 맑은 거울이었다. 그것은 작은 엽서이기에 앞서 한 인간의 반듯한 초상이었으며 동시에 한 시대의 초상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을 읽으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심정은 비단 그를 아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와 무연한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사람이 그리운 시절에 그 앞에 잠시 멈출 수 있는 인간의 초상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모든 독자들의 뜨거운 공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이 영인본을 만들기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뜻을 모아준 친구들에게 다시 감사를 드린다.

1993년 정월 보름.
 여러 친구들을 대신하여, 이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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