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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죽음
형수님께


교도소 뒷산의 공동묘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쾌청했던 추석 양일간에는 성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명절빔으로 곱게 차려 입은 꼬마들이 한몫 톡톡히 거드는 성묘 풍경은 일 년 내내 그렇게도 적막하던 이 산기슭을 환하게 꽃피워놓습니다. 창가에 붙어서서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까지 마치 접견이나 맞은 듯 흐뭇하게 해줍니다.
성묘는 대부분이 가족 단위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서 몇 사람을 더하고 덜하는 5, 6명 규모였지만 개중에는 단 한 사람이 찾아오는 묘가 있는가 하면 10여 명이 넘는 자손들이 길게 늘어서서 절하는 묘도 있습니다. 성묘 방식도 가지각색이어서 부산하게 떼로 몰려와서는 절만 두 번 하고는 휙 지나가는 자손들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과 더불어 묘소에서 한나절 놀다 가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노인 내외가 와서는 풀을 뽑거니 돌멩이를 주워내거니 하며 좀체로 묘 곁을 떠나지 못해 하는 정경을 목격하기도 하고, 젊은 여자가 혼자 찾아와서 무덤보다 더 외로운 모습으로 앉았기도 합니다. 절만 하고 얼른 떠나는 자손들을 보면 아무 상관 없는 철창가의 우리들이 괜히 섭섭해 하거나 괘씸해 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손들이 정성을 쏟는 무덤에서는 망인이 쌓은 생전의 덕업(德業)을 보는 느낌입니다. 젊은 여자가 혼자 와서 아파하는 무덤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죽음을 생각케 합니다.
어쨌든 추석명절에 성묘객들로 생기를 되찾는 묘지의 풍경은, 그 무덤 하나하나가 저승의 것이기보다는 도리어 이승의 살아 있는 사람들과 끈끈히 맺어져 있는 질긴 인연을 실감케 해줍니다. 봉분도 작고 초라하던 무덤도 그 앞에 주과(酒果)를 펴고 절하는 자손들을 보면 그 자손들 속에 전승되고 있는 망인의 생애가 보이는 듯합니다.
요컨대 죽음과 삶에 대한 이른바 소박한 달관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이번 추석에 창가의 우리들을 가장 서운하게 한 이야기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도소 동편 밭머리에 탄생(?)된 지 얼마 안되는 무덤에 관한 이야기인데, 사연인즉 이 무덤에는 아기 둘을 데린 젊은 여자가 근 2년 가까이 한 달에도 몇 번씩 찾아와서 몇 시간씩 앉았다 가곤 했다는데 금년 들어 차츰 발길이 뜸해지더니 결국 이번 추석에 성묘를 오지 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개가(改嫁)한 것이 틀림없다고, 또 개가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거의 몹시 서운해 하는 눈치들입니다. 특히 바깥에 젊은 처자식을 둔 사람일수록 서운함을 금치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지……." "시대가 어느 시댄디, 개가 백번 잘한 일이여."
그러나 속마음은 모두들 서운해 하는 것도 사실이고, 밭머리의 무덤이 더욱 쓸쓸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은 추석 지난 지도 오래여서 묘소를 찾는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성묘를 받은 묘나 받지 못하는 묘나 쓸쓸하기는 매일반입니다.

 

만추(晩秋), 귀뚜라미도 가고 난 지금은 겨울이 가까워서 가을을 가을만으로 느끼게 되지 않습니다만 책 읽기도 좋고, 잠자기도 좋고, 일하기도, 운동하기도, 빨래하기도 아직은 좋은 때입니다.
우용이, 주용이 그리고 특히 형수님의 건강을 빕니다.

 

1986.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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