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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천 년 만에 복권된 『묵자』

   『묵자』는 다른 책보다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또 그 사상적 기반이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난해하지 않은 면도 없지 않습니다. 앞으로 예시문을 함께 읽어가는 동안에 묵자의 이미지가 더욱 분명해지고 다른 학파와의 차이도 부각되리라 생각합니다.
  
   묵자에 관한 『사기』의 기록은 단 24자입니다. “묵적은 송宋나라 대부로서 성城을 방위防衛하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절용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동시대 또는 후세의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현재의 통설은 묵자는 은殷나라 유민遺民들의 나라인 송 출신으로 주周 시대의 계급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반대하고 우禹 시대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 동안 검은 옷을 입고 반전反戰,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묵자』는 묵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논어』와 마찬가지로 후대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모아 편찬한 것입니다. 원래는 71편이었다고 합니다만(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현재는 53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자백가들의 책 중에서 『묵자』가 가장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까닭은 대쪽(竹簡)이 망실되고 뒤바뀐 채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체계를 세워서 읽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오랫동안 도가道家의 경전인 『도장』道藏에 끼어 있었습니다. 청대淸代에 와서야 필원畢沅(1730∼1797)에 의해 『묵자주』墨子注 16권으로 따로 출간됩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묵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셈입니다. 그 뒤 1894년 손이양孫詒讓의 『묵자한고』墨子閒詁 15권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뜻을 통해 읽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잊혔던 책입니다. 민국 초기에 량치차오梁啓超, 후스胡適 등과 같은 비교적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를 달고 분류함으로써 오늘날의 『묵자』로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2천 년 만의 복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묵자』가 난해할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문장이 간결하고, 쓸데없는 설명 즉 일체의 논변이 없기 때문입니다. 『묵자』의 이러한 면을 풍자한 예화가 『한비자』에 나옵니다. 진秦나라 임금이 딸을 진晉나라 공자公子에게 출가시켰습니다. 그 딸을 시집보낼 때 70명의 첩을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혀 딸려 보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공자는 그 첩들을 사랑하고 그 딸은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논변이 많으면 그 핵심을 놓친다는 것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지요. 묵자가 이러한 이유로 일체의 논변을 삼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간결한 문장과 농축된 의미를 읽어내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 셈이지요.
  
   현재 전하는 『묵자』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모두 53편입니다. 이 53편이 5부 15권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묵자의 중심 사상은 제2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2권에서 제9권까지의 24편에 개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묵자의 10대 사상으로 알려진 그의 주장이 이 부분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묵자 사상을 고루 개괄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편명을 통해서 내용을 짐작해보기로 하지요.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악非樂, 비명非命, 비유非儒 등 11편입니다. 각 편이 대개 상중하로 구성되어 있어서 모두 24편입니다. 마지막의 두 편을 제외하고 모든 편이 자묵자왈子墨子曰로 시작되고 있어서 묵자의 제자들이 기록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묵자』에는 그 외에도 묵자의 가르침을 요약한 부분, 논리학과 자연과학, 묵자의 언행, 방어 전술 교본 등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묵자』는 읽히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묵자』는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었습니다. 『묵자』 전편이 번역된 것도 불과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번역자가 가까운 지인知人입니다. 비전공인 나로서는 묵자 연구자를 가까운 지인으로 두고 있다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후의 연구 업적들도 제때에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공자와 묵자는 다 같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사회적 위기’로 파악했습니다. 무도無道하고,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자와 묵자는 현실 인식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묵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세 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有三患 飢者不食 寒者不衣 勞者不息)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보더라도 묵자가 기층 민중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묵자는 겸애兼愛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交利라는 상생相生 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連帶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묵자 사상이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있지만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겠습니다. 겸애와 반전 평화를 묵자 사상의 핵심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묵자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한 모범을 보입니다. 실천 방법이 개인주의적이거나 개량주의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언제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이며 철저한 규율로써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묵가는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불 속에도 뛰어들고 칼날 위에도 올라설 뿐 아니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길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皆可使赴火踏刃 死不施踵: 『淮南子』).
  
   아마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전국시대, 그리고 진秦나라 초까지만 하더라도 묵가는 유가와 함께 가장 큰 세력을 떨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가장 큰 학파는 유가와 묵가이며(一世之顯學 儒墨也: 『韓非子』), 공자와 묵자의 제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했습니다(孔墨之弟子徒屬 滿天下: 『呂氏春秋』).
  
  『회남자』를 쓴 유안劉安(BC. 178∼122)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묵가가 활동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사마천司馬遷(BC. 145∼86)이 『사기』를 썼던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한 무제漢武帝(BC. 140∼87) 때 동중서董仲舒(BC. 179∼93)의 건의로 유학儒學이 국교가 되면서 묵가가 탄압되었고 해외로 망명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시기가 대체로 기원전 100년경입니다.
  
   진秦, 한漢 이래 사회적 격동기가 끝나고 토지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 중심의 신분 사회가 정착되면서 묵가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는 평등주의 사상이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맹자는 이러한 겸애 사상을 비현실적이며 비인간적인 엄숙주의로 매도합니다. 무엇보다도 묵가는 그 사상의 사회적 기반이 와해되면서 함께 소멸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기층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을 조직하여 세습 귀족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최초의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배 집단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소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난 후인 19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유교 사회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여 재조명됩니다. 그래서 2천 년 만의 복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요. 『묵자』의 기구한 운명은 민중들의 그것만큼이나 장구한 흑암의 세월을 견뎌온 셈입니다.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신청년운동新靑年運動과 함께 『묵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제자백가 중 가장 위대한 경험론자, 평등론자로 평가받으면서도 하느님 사상(天志論)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한편 우파로부터는 세습과 상속을 반대하는 그의 평등사상 때문에 여전히 배척되는 기구한 운명을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라면 묵자는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11세기 이래의 혈연 중심의 귀족 봉건제(宗法社會)가 급격히 붕괴되고 새로운 비귀족적 지주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태동하는 시기입니다. 기원전 8세기 이래 중국의 고대사회는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이행하면서 토지 생산력이 급격히 상승하여 봉건 제후들 간에 서서히 경제적 교류와 정치적 통합이 진행됩니다. 토지의 사유화가 다투어 진행됨에 따라 지주 계층이 성립되고 또한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도 발전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논어』 편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행정, 경제 및 군사적 이유로 도시가 발달하게 됩니다. 당연히 종래의 혈연 중심의 인간관계가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수많은 담론들이 제자백가를 통해 제기됩니다.
  
   공자는 서주西周 이래의 예악禮樂에 나타난 귀족 중심의 통치 질서를 새로운 지식인(君子)의 자기 수양과 덕치德治의 이념을 통하여 회복(維新)하려고 노력했지요. 이에 반하여 묵자는 종래 귀족 지배 계층의 행동 규범인 예악을 철저히 부정하고 유가의 덕치 이념 대신에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인민의 협동적 연대(兼相愛)와 경제적 상호 이익(交相利)을 통하여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려고 했습니다. 유가와는 달리 숙명론을 배격하고 인간의 실천 의지, 즉 힘(力)을 강조합니다. 실천 의지를 추동推動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鬼와 신神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리고 천자의 절대적 통치권을 주장합니다. 만민 평등의 공리주의公利主義와 현자 독재론賢者獨裁論을 표방합니다. 묵가 학설의 이러한 개혁성과 민중성은 유가 사상과 대항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러한 과도기가 끝나고 중국 사회가 토지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 계층의 엄격한 가부장적 신분 사회로 정착되면서 묵가학파는 사라지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고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묵가 학설은 결국 그 학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의 와해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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