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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爲圃者忿然作色而笑曰
   吾聞之吾師 有機械者 必有機事 有機事者 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        ―「天地」

   자공子貢이 초楚나라를 유람하다 진晉나라로 가는 길에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었는데 힘은 많이 드나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자공이 용두레(槹)라는 기계를 소개합니다.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用力甚寡 而見功多) 기계를 소개하자 그 노인은 분연히 낯빛을 붉히고 이야기합니다. 위 예시문은 노인이 자공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이 구절을 소개하는 이유는 기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는 화두로 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내용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풀어서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
   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機事)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純白不備).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神生不定)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道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그 다음 이야기도 매우 신랄합니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하고 있는 자공에게 댁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노인이 묻습니다. 자공이 공구孔丘의 제자라고 대답하자 노인은 공자를 신랄하게 욕합니다.

   그자는 많이 아는 체하고, 성인을 자처하고, 백성들을 속이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이
   노래하며, 천하에 명성을 팔고 다니는 자가 아닌가! 자네도 그런 생각을 버리고 심신의 속박에
   서 벗어나야 비로소 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있겠네. 제 몸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
   느 여가에 천하를 다스린단 말인가? 내가 하는 일을 어리석다 하지 말고 그만 가보시게. (子非
   夫博學以擬聖 於于以蓋衆 獨弦哀歌 以賣名聲於天下者乎 汝方將忘汝神氣 墮汝形骸 而庶幾乎
   而身之不能治 而何暇治天下乎 子往矣 无乏吾事)

   이 예시문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장자의 속뜻에 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입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닙니다. 도의 깨달음과 도의 체득 그리고 합일입니다. 물론 현대의 동양에서는 이미 이러한 가치와 정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양의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현대의 특징입니다. 기계에 대한 장자의 주장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기계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계는 그 속성인 기사機事와 기심機心으로 인하여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기계의 발명과 산업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노동 문제, 노동자 문제, 노동 계급 문제 등은 장자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나아가 공황이나 실업 문제에 대해서도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짚어보지요. 장자의 논거는 오늘날의 논의와는 그 장을 달리 합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고,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경멸적 문화가 자리 잡는 그러한 일련의 반노동 과정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지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支出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1810년대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입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 파괴에 나섰던 것이지요. 기계가 사람을 쫓아냈기 때문이었어요. 기계로 인한 실업, 즉 상대적 과잉인구를 문제로 파악한 것이지요. 이러한 러다이트 운동에 대하여 내린 평가는 기계와 기계의 자본주의적 채용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잘못된 운동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습니다. 기계가 사람을 추방한 것이 아니라 기계의 채용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입니다. 기계의 효율성은 생산력의 발전에 필요한 것으로 승인됩니다. 다만 그것이 자본의 논리로 채용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지요. 기계의 효율성이 노동 시간의 단축과 노동 경감으로 이어지지 않고 노동자의 해고 즉 실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물론 틀린 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장자와 함께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적 채용 형식이 아니라면 기계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기계는 그 효율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여가를 가지게 하고 그 생산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로 인한 실업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여가와 소비의 증대가 인간성의 실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곧 장자의 문제의식입니다.

   장자가 제기하는 것은 경제학에서 다루는 문제보다는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도道의 문제입니다. 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그 편리성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용두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이 안정되려면 자연과의 조화가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하지요.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은 사람과 기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여러분은 주관적인 것은 사람이고 기계는 철저하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 포기 풀이 자라는 것을 보더라도 그 풀은 햇빛과 물과 토양과 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에는 깜깜한 땅속에서 뿌리로만 견디며 봄을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나 기계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일을 못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철저하게 자기 식대로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주변 조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습니다. 나한테 먹을 가는 기계가 있습니다. 먹 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더러는 이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가끔씩 고소를 금치 못합니다. 이 기계는 자기 식대로만 움직입니다. 물이 없는데도 개의치 않고 계속 갈고 있습니다. 이 기계가 먹물의 농담濃淡을 알맞게 해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최근 여론조사 전화가 부쩍 많이 걸려옵니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것은 기계와 기계가 서로 응답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옆에서 보자니 가관이었어요. 이미 녹음된 질문이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쪽도 응답기가 돌아가는 것이지요. 기계와 기계가 서로 상대방을 고려하는 법 없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효율성 논의에 그치지 않고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가 우려했던 당시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三人行而一人惑 所適者猶可致也 惑者少也 二人惑則勞而不至 惑者勝也 而今也以天下惑 予雖有祈嚮 不可得也 不亦悲乎: 「天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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