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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가 보이지 않는 『노자』

  
   『사기』에 노자는 성명이 이이李耳, 자字는 백양伯陽, 시호諡號는 담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견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으로 주 왕실의 장서실藏書室을 관리하는 수장리守藏吏를 지냈다. 공자가 찾아와 예禮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는데 노자는 훌륭한 상인이라면 물건을 깊이 숨겨두고 아무것도 없는 듯 하듯이 군자는 큰 덕이 있더라도 용모는 어리석게 보이는 법이라고 하면서 교기驕氣, 다욕多欲, 태색態色, 음지淫志를 버리라고 충고하였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자의 충고는 공자의 인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상인이라면 물건을 깊이 숨겨두고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하는 법이라는 충고는 공자에게 아는 체하지 말라는 뜻이라고밖에 이해할 수 없지요. 공자는 교만한 사람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며, 그리고 표리부동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공자의 인격이 아니라 오히려 사마천이 이러한 기록을 남긴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노자에 관한 기록은 이처럼 대단히 한산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논어』에서 공자孔子의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노자』에는 노자老子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노자를 생환한다는 의미가 그 인간의 생환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우리의 『노자』 독법이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노자의 생존 연대는 『사기』에서조차도 확실한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학자들은 대체로 맹자孟子 뒤, 한비자韓非子 앞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노자』 제1장이 바로 유가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며 그것도 명교名敎를 분명히 하고 난 이후의 유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맹자 이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비자 이전이라는 것은 『한비자』에 『노자』를 해설한 「유로」喩老, 「해로」解老 두 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81장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上篇은 도道로 시작하고, 하편下篇은 덕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주周나라가 쇠망하자 노자는 주나라를 떠납니다. 이때 관윤關尹이라는 사람이 노자를 알아보고 글을 청하자 노자가 이 『도덕경』 5천 언言을 지어줌으로써 후세에 남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설파한 노자가 언言을 책으로 남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백낙천白樂天의 시 「노자」가 그런 내용입니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 법
   이 말을 나는 노군老君에게 들었노라.
   만약 노군이 지자知者라면 무슨 까닭으로 스스로 5천 자를 지었나.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는 노자 개인의 저작이 아님은 물론이며,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운자韻字를 붙인 구句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서 한 사람의 필체가 아니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주요 부분은 한 사람이 정리한 것으로 봅니다. 금본今本 『노자』는 왕필王弼(226∼249)이 주석한 왕본王本을 지칭합니다. 1973년 마왕퇴馬王堆 고분古墳의 백서帛書 『노자』가 발굴되고, 1993년 호북성 곽점촌郭店村에서 죽간본竹簡本이 발견되었지만, 『노자』라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몇 종류의 『노자』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을 뿐이며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대체로 기원전 350∼기원전 200년경의 집단 창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자』 주석은 3천여 가家가 주註를 달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것만 1천여 개나 되며, 현재 346종의 주석註釋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주석 중 최고最古의 것이 하상공河上公의 주와 왕필의 주입니다. 하상공은 한대漢代 사람으로 『노자』를 주로 도교적道敎的 관점에서 주하였으며, 왕필의 주는 위진魏晉 시기의 것으로서 현학玄學의 일환으로 쓰인 것입니다. 왕필이 16∼18세의 나이에 썼다고 알려진 노자주老子註는 글자의 수가 1만 1,890자로 누가 누구를 주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지요. 왕필은 『노자』를 주석한 목적이 숭본식말崇本息末에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본本을 높이고 말末을 종식시키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왕필이 말하는 본이란 자연을 의미하며, 말이란 유법儒法의 인위적 규제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왕필은 23세 때 『주역』을 주석하여 노역老易을 회통會通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필의 노자주가 지금까지 『노자』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왕필은 『노자』와 『주역』을 회통하고 있는데, 왕필의 시대적 상황이 노자의 그것과 닮았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왕필이 주를 달았던 시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三國志의 시대입니다. 조조曹操, 유비劉備,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역사 무대를 누비던 시기이지요. 한말漢末 북방이 전란에 휩싸이자 왕필 일가는 동문인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를 찾아가 의탁하게 됩니다. 형주는 유표 사후에 조조에게 귀속되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조조가 군림하다가 조조 사후에 사마의司馬懿의 정변으로 위魏가 멸망하고 다시 진晉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급격한 변화가 바로 이 형주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물론 당시는 대제국인 한漢의 피폐와 붕괴 그리고 대규모 농민반란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삼국지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또 하나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극상과 혼란의 시대였지요. 한대漢代의 명교적名敎的 질서가 무너지고, 영원불변한 강상적綱常的 질서가 흔들리는 시기입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천도天道가 부정되는 시기입니다. 천도와 대일통大一統의 관념이 부정되고, 개방적이고 능동적인 사고로 변화하는 격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대의 명교 체제名敎體制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것이 시대사조로 자리 잡았던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변화된 시대적 상황에서 왕필은 당시의 현학顯學이던 법法·명名·유儒·묵墨·잡가雜家 등은 모두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추구하는, 그 어미를 버리고 자식을 취하는 기모용자棄母用子의 사상이라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춘추전국시대의 노자의 입장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필은 노자와 마찬가지로 근본적 사유, 즉 철학적 문제의식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왕필은 거대하고 복잡한 명교 체제와 번망繁妄한 한대漢代 경학經學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근본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욕망의 소종래所從來와 명교의 소이연所以然을 밝히는 참된 도道를 추구했던 것이지요. 그것이 곧 무無를 근본으로 하는 이무위본以無爲本의 철학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왕필 철학의 기본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숭본식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간단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정리한다(以簡御繁)는 것이지요. 무無를 본本으로 삼고 유有를 말末로 삼는 귀무론貴無論이 『노자』 독법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왕필의 노자주가 『노자』를 가장 정확하게 읽고 있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왕필의 시대와 그의 철학적 입장이 『노자』에 대한 가장 올바른 독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왕필의 『노자』가 금본今本 『노자』이며 왕필의 노자주가 『노자』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왕필은 『노자』를 주註했다기보다는 『노자』를 편집했다고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전승되어오던 『노자』 텍스트를 자신의 입장과 관점에서 정리하고 편집하여 금본 『노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지요. 물론 왕필본의 『노자』가 사실은 백본帛本 『노자』나 죽간본 『노자』와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전승된 또 하나의 『노자』 텍스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지요.

   『노자』는 산문散文이라기보다는 운문韻文입니다. 5천여 자에 불과한 매우 함축적인 글이며 서술 내용 역시 담현談玄입니다. 더욱이 노자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 위에 간결한 수사법은 여타 철학적 논술에 비하여 월등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앞으로 예시 문안을 읽으면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노자』는 무위無爲와 관조觀照라는 동양적 사유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일 뿐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서구에 소개된 이후 현재 약 60여 종의 번역본이 있으며 현대 서구 사상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어쨌든 나로서는 『노자』 강의가 질주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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