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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

   다음 장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나타나 있는 글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다는 것이 이른바 맹자의 성선설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성선설을 입증하는 근거가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글에서 이끌어내야 하는 것은 본성론本性論에 대한 비판적 관점입니다. 본성을 전제하고 그 본성으로부터 사회 이론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논리에 대한 반성입니다. 구조론構造論, 본질론本質論, 원죄론原罪論 등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그 기계론적機械論的 구조의 단순성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그 본성으로 규정하는 이론, 그리고 그러한 본성에 근거한 인간 이해를 근거로 구축하는 사회학에 대하여 아마 여러분도 매우 회의적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서슴없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그 본성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있는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을 읽기 전에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문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이 장은 인간 본성보다는 본성의 확충에 무게가 실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문이 좀 길지만 모두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之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公孫丑 上」

   맹자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선왕들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손바닥 위의 물건을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써 미루어볼진대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仁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知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네 가지 싹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선善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이 네 가지 싹을 가지고 있는 사람 누구나 그것을 키우고 확충시켜 나갈 줄 안다면 마치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나 막 솟아나기 시작한 샘물처럼 될 것이다(크게 뻗어나갈 것이다). 그 싹을 확충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는 천하라도 능히 지킬 수 있고 그것을 확충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자기 부모조차도 제대로 모실 수 없게 될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장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표명된 구절입니다. 성선설의 요지는 모든 사람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우물에 빠지는 어린아이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예를 들어 성선설을 주장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의 구성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모든 사람이 불인인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적인 선언을 먼저 하고 선왕의 어진 정치가 바로 이러한 성선性善에서 비롯되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왕의 선한 정치가 성선설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선왕 중에는 포악한 정치를 한 왕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다음 그 근거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러한 측은지심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 본성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 때문이 아니다 등 사회적으로 습득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일단 수긍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측은지심을 근거로 하여 사단四端으로 나아갑니다. 측은지심으로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을 모두 이끌어낸다는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입니다. 우물의 어린아이 이야기로써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측은지심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仁을 뺀 나머지 즉 의義, 예禮, 지智라는 세 가지의 단은 우물의 어린아이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논리적인 비약과 무리를 남겨둔 채 서둘러서 인의예지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매우 선언적 주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장의 목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단의 확충’으로 넘어갑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장에서 맹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인의예지의 사단과 이 사단의 확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은 다분히 윤리적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천명론天命論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천명을 본성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입니다. 『중용』에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나와 있지요. 맹자는 공자의 천명론과 예론禮論을 계승하되 천명을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화하여 극기克己에 의한 본성의 회복에서 예禮를 구합니다. 천명→본성→사회적 질서(禮)라는 체계를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천명은 맹자의 천성으로 이어지고 다시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이르러서는 천성이 곧 천리天理라는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으로 계승됩니다. 송대의 객관적 관념론에 대하여는 『대학』, 『중용』 편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여하튼 맹자의 성선설은 사회 원리인 예禮가 (그것이 봉건적 사회 원리이든, 고대 노예제 사회의 원리이든) 인간 본성에 순응하는 천리天理라는 것을 밝히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 윤리인 인仁보다는 객관적 구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객관적 구조가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보다 효과적인 이론으로 기능하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맹자의 성선설은 ‘불인인지심’을 확충하는 체계이며 이 불인인지심의 확충이 곧 본성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사회화가 곧 맹자’라는 논리가 확인되는 셈입니다.

   이 장과 관련해서 여러분에게 논의의 과제로 남겨두고 싶은 한두 가지 대목이 있습니다. 우선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는 대목(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입니다. 이것은 윤리적 차원의 선언이기는 하지만 “만민萬民은 평등하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매우 중요한 맹자 사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사실 나는 사회 원리로서는 측은지심惻隱之心보다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더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측은지심은 인간 이해와 관련된 정서라 할 수 있고 수오지심 즉 부끄러움은 인간관계 즉 사회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곡속장쬢푛章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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