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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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존과 평화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에서 먼저 지적해야 하는 것은 화와 동을 대비의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詳述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시漢詩의 대련對聯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개념은 차이를 규정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됩니다. 소위 독특獨特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identity)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他者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데리다J. Derrida의 표현에 의하면 관계 맺기와 차이 짓기, 즉 디페랑스differance(差延)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F. Saussure의 언어학이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차이란 두 실체 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형성하는 두 개의 독립 항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의 경우에는 이러한 독립 항목이 전제되지 않는 것이지요. 모든 것에 대한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차이가 본질이 되는 역설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동양적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대비의 방식은 이러한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우회하고 뛰어넘는 탁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통체적統體的이기 때문에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 즉 개념적 방법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인식 과정의 불가피한 방법상의 문제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항 대립적 차이이건 또는 모든 것과의 차이화를 통한 개념 구성이든 상관없이 차이 짓기 방식은 결과적으로 부분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전체의 모습을 못 보게 하지요. 대비 방식은 이러한 차이화에 대한 경계이며 분分과 석析의 방식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서 근대성과 다른 일면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란 어차피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 대한 일차적 인식으로서의 이른바 감성적 인식은 부분적 인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분리된 대상을 더욱 정치精緻하게 개념화하는 방식은 전체와의 거리를 더욱 확대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심화 과정에서 대상 그 자체가 관념화된다는 사실이지요. 이에 비하여 대비의 방식은 분리된 대상을 다시 관계망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대상 그 자체의 관념화를 어느 정도 저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양학에서 대체로 대비의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동양학 그 자체가 관계론적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어』의 이 화이부동和而不同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화和와 동同을 대비로 보지 않습니다. 화를 화목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의미로 해석하고 동을 부화뇌동附和雷同과 동일同一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어느 경우든 화와 동이 대對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동의 의미도 첫 구와 다음 구에서의 의미가 각각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구에서는 부화뇌동 즉 자신의 분명한 입장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다음 구에서는 동일함 즉 차이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동을 시종 윤리적 수준에서 해석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라면 새롭게 재조명할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나는 이 강의의 서론 부분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21세기의 구성 원리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문명을 가장 앞서서 실험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자부심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대륙적 소화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해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佛學이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이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지요.

   유럽 근대사는 존재론적 논리가 관철되는 강철의 역사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근대사의 정점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패권적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논리가 바로 존재론의 논리이며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同의 논리입니다. 종교와 언어까지도 동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식민지 역사를 경험했지요. 그러므로 동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중국적 의지에 대해서는 일단 그 역사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새로운 문명이 근본에 있어서 또 하나의 동同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는 철저히 문화적인 것이며 결코 패권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설령 그러한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화주의란 군사적 강제나 정치적, 경제적 강제를 배제한다는 의미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다른 문화, 다른 가치,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관용과 공존을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근본에 있어서 얼마든지 또 하나의 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구성 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는 이러한 화동 담론이 우리의 통일론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로 대립하고 있고 또 지금까지 흡수합병이든 적화통일이든 기본적으로 동同의 논리에 따른 통일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통일론을 동의 논리가 아닌 화의 논리로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입니다. 화의 논리는 무엇보다 먼저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통일 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존과 평화 정착은 통일 과정에서 요구되는 전 과제의 90%를 차지할 만큼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공존과 평화 정착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 이후부터는 대체로 시간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화의 원리는 통일 과정의 출발점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우리의 통일 과정에 있어서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가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구도를 모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화의 원리는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세계사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화의 원리로 우리의 통일 과정을 이끌어가는 노력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부터 세계사적 과제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화의 논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물론 보다 종합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동 담론을 고담준론으로 이끌어가고 말았습니다만 『논어』의 이 구절을 일상적 의미로 읽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자기 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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