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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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제8장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도무수유道無水有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로써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특히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경우 최고의 선은 현덕玄德이며 도道입니다. 물은 물론 현덕이 아닐 뿐 아니라 도 그 자체도 아니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로雨露가 되어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投降主義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목표 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경로의 선택이나 진행 방식에 무리가 있는 경우에 다투게 됩니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무리無理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지요. 쟁爭이란 그런 점에서 위爲의 다른 표현이고 작위作爲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 되는 것을 노자는 ‘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전국위상全國爲上 파국차지破國次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라를 깨트려서 이기는 것(破國)은 최선이 못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국全國, 즉 나라를 온전히 하여 취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뜻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자』 마지막 장인 제81장의 마지막 구가 ‘천지도天地道 이이불해利而不害 성인지도聖人之道 위이부쟁爲而不爭’입니다. “천지의 도는 이로울지언정 해롭지 않고, 성인의 도는 일하되 다투는 법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曲流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나는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대단히 풍부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자 사상이 민초들의 정치적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노자』는 지식인 내부의 비판 담론이며, 근본에 있어서 고도의 제왕학帝王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도가道家의 무리는 대개 사관史官에서 나왔으며 이는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리는 술수術數를 기술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위 ‘무위의 통치’는 군주의 비밀 정치론이라는 것이지요.

   앞에서 읽은 제3장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한다는 것은 곧 우민화이며,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게 한다는 것은 배만 부르게 하고 머리는 비게 한다는 것이지요. 의지를 약하게 만들고 뼈를 튼튼하게 한다는 것은 비판 의식을 제거하고 힘든 노동에 견딜 수 있도록 육체만 튼튼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비판은 결과적으로 『노자』를 철학의 차원으로부터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자』는 중국 사상사에서 최고의 철학적 담론임에 틀림없습니다. 백 보를 양보하여 『노자』를 정치사상이나 이데올로기라고 하더라도, 『노자』의 정치학은 철저한 비판 담론이란 점에서 민초들의 입장과 정서에 닿아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이 속출하게 됩니다. 직접 일하지 않고 패자覇者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 계층이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노자는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사회학과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 철학적 논리로 승화시킵니다.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체계를 완성합니다. 여기에 시대를 초월하고 있는 『노자』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로 패권 경쟁을 둘러싼 일체의 행위를 반자연의 무도無道한 작위로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자』가 군주학이 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패권 경쟁의 무도한 작위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 그것이 민초들의 정치학인 셈이지요. 뿐만 아니라 반전反戰 중명重命 사상을 설파하고 약한 자가 이긴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노자의 비판 담론은 전쟁의 최대 희생자인 민초들의 삶과 투쟁에 뛰어난 실천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이며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라는 천하 대란을 당하여 모든 억압과 착취는 결국 가장 약한 민초들의 부담으로 전가됩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과 재산을 잃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의 고통은 결국 민초들의 몫입니다. 이러한 민초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노자』 곳곳에 피력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지배자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 먹기 때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제75장).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제78장). 이 78장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물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유약柔弱이 사직社稷의 주인이 되고 천하의 왕이 되는 까닭,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이유를 읽어내야 합니다. 왜 그러한 힘이 약한 것에 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낙수落水가 댓돌을 뚫는 이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다수여야 합니다. 양적으로 우세해야 합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正義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불벌중책不罰衆責,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는 신호 위반자를 처벌하기보다는 신호등을 철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소수의 선동가에 의해서 다수의 의견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론 권력에 의해서 여론이 조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수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제66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이기선하지以其善下之’.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선善은 well이 아니라 more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 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노자의 물은 민초들의 정치학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실천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혁 역량은 대단히 취약합니다. 절대적인 역량에 있어서 취약하고 더구나 부문별로 또는 정파 단위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처럼 분산된 부문별 역량들의 결합 수준 또한 대단히 저급하기 때문입니다. 연대야말로 당면의 실천적 과제인 것이지요.

   그리고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 연대下放連帶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입니다. 노동·교육·농민·환경·의료·시민 등 각 부문 운동이 각자의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 대신에 보다 약하고 뒤처진 부문과 연대해 나가는 하방 연대 방식이 역량의 진정한 결집 방법이라고 생각하지요. 중소 기업, 하청 기업, 비정규직, 여성, 해고자, 농민, 빈민 등 노자의 물처럼 낮은 곳을 지향하는 연대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방 연대에는 보다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만 이러한 연대 담론에 있어서 노자의 생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이 구절도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문법적으로 선善을 형용사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부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地·연淵·인仁·신信·치治·능能·시時를 동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든 문법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전 독법의 요체는 일관성입니다. 전체의 의미 맥락에 따라서 읽어야 하고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읽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민초들의 정치학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구체적으로는 연대와 전위 조직의 과학적 실천 방법에 관한 강령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요. 이 문장의 주어는 물론 물입니다.

   ‘거선지’居善地는 현실에 토대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민중들과의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는 현실 노선과 대중노선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심선연’心善淵은 마음을 비운다(虛靜)는 의미입니다. 사사로운 목표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여선인’與善仁의 여와 인은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동지적 애정으로 결속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언선신’言善信은 그 주장(言)이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선치’正善治의 정正은 정政입니다. 바로잡는 것, 즉 개혁과 변혁입니다. 그 방법이 치治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평화로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도 방식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정政의 방법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강제나 독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최대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이끌어낸다는 의미입니다. ‘사선능’事善能은 전문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동선시’動善時는 그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제시한 실천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과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不爭)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無尤)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부쟁唯不爭 고무우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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