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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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다

   나는 오래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묵자의 표현을 따른다면 ‘덜 물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부끄러운 경험을 멀리 우크라이나에서 하게 됩니다. 키예프에는 전승 기념탑이 있습니다. 2차 대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탑입니다. 나는 그 탑을 보면서도 그것이 전승 기념탑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의 뇌리에 전승 기념탑은 미 해병대 병사들이 점령한 고지에 성조기를 세우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키예프의 전승 기념탑은 언덕 위에 팔 벌리고 서 있는 모상母像이었습니다. 내가 의아해 하자 안내자가 설명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언덕에 서 있는 어머니의 상像이야말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전승의 의미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어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전쟁과 승리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가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지요.
   묵자가 반전 평화론을 전개하면서 부딪친 가장 힘든 장애가 당시 만연하고 있던 사회적 관념이었습니다. 부국강병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쟁이라는 패권 시대의 관념이 최대의 장애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쟁이란 국위를 선양하고 백성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전쟁이란 비록 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단히 이로운 것이라는 지배 계층의 사고가 피지배 계층의 의식에까지 깊숙이 침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전쟁이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의 전쟁 불감증까지 감안한다면 묵자의 고충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묵자의 고민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소염론所染論입니다.

   子墨子見染絲者 而歎曰 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
   五入必而已則 爲五色矣 故染不可不愼也
   非獨染絲然也 國亦有染        ―「所染」

   『천자문』에 ‘묵비사염’墨悲絲染이란 글이 있습니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묵비사염’의 원전입니다. 바로 묵자의 소염론입니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所染)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染當)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묵자는 임금과 제후가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신하들로부터 올바르게 물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허유許由와 백양伯陽에게 물들어 어진 정치를 한 순舜임금과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에게 물든 제환공齊桓公을 선정善政의 예로 들고, 반대로 간신 추치推?에게 잘못 물든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장유삭長柳朔과 왕성王슬에게 잘못 물든 범길야范吉射를 폭정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물든다는 것은 곧 묵자의 사회 문화론이 됩니다.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것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나라가 그렇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개술국에서는 맏아들을 낳으면 잡아먹으면서 태어날 동생들에게 좋은 일이라 하고, 할아버지가 죽으면 할머니를 져다 버리면서 귀신의 아내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한다든가, 또 담인국에서와 같이 부모가 죽으면 시체의 살을 발라내고 뼈만 묻어야 효자라고 하는 풍습도 나라 전체가 잘못 물든 예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소염론은 묵자의 학습론과 문화론의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묵자가 오늘의 우리 사회를 방문한다면 여전히 탄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탄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애」와 「비공」을 중심으로 『묵자』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반드시 읽어야 할 편들이 더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절용」편입니다. 절용은 물건을 아껴 쓰는 검소함입니다. 절용은 밖에서 땅을 빼앗아 나라의 부富를 늘리는 대신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두 배로 늘리는 것입니다. 재물의 사용에 낭비가 없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자의 사과론(「辭過」)입니다. 과소비를 없애는 것이지요. 반전론의 대안이라 할 만합니다.

   옛날의 성왕은 궁실을 지을 때 단지 생활의 편의를 고려했을 뿐 결코 보고 즐기기 위하여 짓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궁실을 짓는 법은 이롭지 않은 것에는 비용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聖王作爲宮室 便於生 不以爲觀樂也 故爲宮室之法曰 凡費財勞力不加利者 不爲也: 「辭過」)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는 것은 성왕의 도이며 천하의 큰 이익이다. (去無用之費 聖王之道 天下之大利也: 「節用」)

   묵자가 무용無用한 것으로 예시하는 것 중에는 창칼을 비롯하여 궁궐·옷·음식·수레·배·장례·음악 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묵자의 절용은 비공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비악非樂, 절장節葬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순자는 묵자를 비판하여 “실용에 눈이 가려 문화를 모른다”(墨子蔽於用 而不知文), 즉 문화라는 소비가 생산을 증대시킨다는 반론을 폈던 것이지요.
   “절용이 미덕이다” “아니다”, 오늘날도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과소비를 삼가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이다가 다시 경기 활성화를 위해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반대의 목소리에 가려지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생산과 소비 수준은 한마디로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하여 그 규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 축적 논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나는 사실 거리마다 즐비한 그 많은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해야 할지 걱정됩니다. 마찬가지로 10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계속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경기를 벌여야 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장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所用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생산 규모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묵자의 절용이 과연 문화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문화 그 자체가 과연 인간적인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용없는 물건의 생산에 대해서도 무척 관대합니다. 그런 것을 만드는 사람들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일견 인간적인 논리로 합리화하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입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구조를 어떻게 짜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기업의 논리, 경쟁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서 생산 규모와 소비 수준이 설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진보는 단순화라는 간디의 명제를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묵자의 「절용」편은 소염론所染論, 사과론辭過論과 함께 과잉 생산과 대량 소비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 구조를 조명하는 유력한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낭비 구조와 함께 거대한 소염所染 구조도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묵가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묵자 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묵가의 조직과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묵자 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삼표’三表의 원문을 읽어보지요. 삼표란 세 가지 표준이란 의미입니다. 판단에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준이 없는 것은 마치 녹로쾖콼 위에서 동서東西를 헤아리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떤 것이 이로운 것인지 어떤 것이 해로운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표론三表論은 이를테면 인식과 판단의 준거에 관한 논의입니다.
   묵가가 제자백가 중에서 현학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자』에는 윤리적 차원의 주장에 그치지 않고 그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구조와 철학적 사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유는 사실판단(知)의 기초 위에서 가치판단(意)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실판단의 기초가 되는 지각과 경험이 없으면 그 주장이 망상에 빠지게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가치판단이 없는 지각과 경험만으로는 사실을 일컬을 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 즉 지知와 의意가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항상 판단의 표준을 세우지 않으면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묵자의 주장이며 삼표가 바로 판단의 세 가지 표준입니다.

   何謂三表 …… 有本之者 有原之者 有用之者
   於何本之 上本於古者聖王之事
   於何原之 下原察百姓耳目之實
   於何用之 發以爲刑政 觀其中國家百姓人民之利
   此所謂言有三表也        ―「非命 上」
   무엇을 삼표라고 하는가. …… 본本, 원原, 용用이 그것이다. 어디에다 본本할 것인가? 위로 옛 성왕聖王의 일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어디에다 원原할 것인가? 아래로 백성들의 이목(현실)을 살펴야 한다. 어디에다 용用할 것인가? 나라의 법과 행정이 시행(發)되어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합치하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소위 판단(言)의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한다.

   묵자의 삼표는 첫째는 역사적 경험이며, 둘째는 현실성이며, 셋째는 민주성입니다. 그리고 세번째의 표준인 용用, 즉 국가·백성·인민의 이익에 대하여 묵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부富·상象·안安·치治가 그것입니다. 부富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만 묵자의 경우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상象은 인구를 늘리는 것입니다. 안安은 삶의 안정성입니다. 그리고 치治는 평화입니다. 어느 것이나 묵자 사상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겸애兼愛·비공非攻·절용節用·사과辭過의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묵자에게 있어서 판단의 표준은 묵자의 사회 정치적 입장을 의미합니다. 묵자의 입장은 기층 민중의 이익입니다. 그리고 기층 민중의 이익은 전쟁을 반대하고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것(交利)입니다.
   이처럼 묵자 사상의 근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용·절장節葬·사과 등 근검절약할 것을 주장하여 자연의 질서와 사회적 구조를 함께 온전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묵자 사상은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철학적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적 입장에 있어서 어느 학파의 사상보다도 관계론에 철저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이 겸애와 교리라는 사회적 가치로 구현되고 다시 이 겸애와 교리가 당대의 사회적 조건에서 반전 평화, 절용이라는 실천적 과제와 통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공전攻戰과 별애別愛는 존재론적 논리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배타적으로 강화하려는 강철의 논리입니다. 전쟁과 병합은 기본적으로 존재론적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적 구성 원리가 청산되지 않는 한 사회적 혼란은 종식될 수 없다는 것을 묵자는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국國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가家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몸(身)만을 생각하는 것이 존재론적 논리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논리가 청산되지 않는 한 사회는 무도無道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국과 국이, 가와 가가, 사람과 사람이 평화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나아가 서로 돕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묵자의 근본적 과제입니다. 이처럼 묵자의 도는 근본에 있어서 관계론입니다. 묵자는 결코 일방적인 사랑이나 희생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상호 관계를 강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관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겸애와 함께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관계의 본질을 상생相生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묵자는 겸애와 교리를 하늘의 뜻이라고 합니다. 묵자의 천지론天志論입니다. 그러나 묵자의 천天은 인격천人格天이나 절대적 천이 아니라는 것이 많은 연구자들의 결론입니다. 묵자의 천지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겸애의 도를 실행하게 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입니다. 묵자의 하느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현세와 인간세계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묵자의 천지론이 전체 체계에 있어서 그러한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묵자는 바로 이 삼표론에서 천天이 단순한 기능적 천이 아님을 천명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천은 도道와 마찬가지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겸상애兼相愛와 교상리交相利가 하늘의 뜻이라는 주장은 그것이 세계의 본질적 구조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묵자의 이러한 사상이 바로 천지天志가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 이외의 어떤 것도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묵자의 비명 사상非命思想입니다. 이 삼표론 역시 「비명」편非命篇에 있습니다. 비명이란 하늘이 정한 운명과 숙명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화복禍福은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며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은나라와 하나라의 시詩를 인용하여 “천명天命이란 폭군이 만들어낸 것이다”(命者暴王作之)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폭군이 자의적인 횡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 천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묵자의 천天은 인격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자의 도와 같은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상애상리相愛相利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형식으로 그의 사상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묵자는 하늘 이외의 모든 존재, 즉 부모, 학자, 군주는 법이 될 수 없다(父母學者君 三者莫可以爲法: 「法儀」)고 합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을 남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며, 학자는 하느님보다 지혜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자의 지식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죽은 관념에 불과하고 그나마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어서 평등한 사랑을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주란 인민의 의義를 하느님의 뜻과 화동일치和同一致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수단일 뿐 그 자신이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묵자의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묵자의 사상 체계가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묵자』의 모든 내용은 묵자의 사회적 입장과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묵자의 하느님 사상까지도 전체 체계의 일환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국民國 초기의 사회운동 과정에서 이러한 묵자의 천지론을 종교적이라고 단정한 좌파의 비판은 결과적으로 매우 교조적인 해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묵가의 조직과 실천의 엄정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여씨춘추』에 있는 기록입니다. “기원전 381년 양성군陽城君의 부탁을 받고 초나라의 공격에 대항했으나 패하였다. 거자鉅子 맹승孟勝 이하 183명이 성城 위에 누워 자살했다.” 묵가는 집단 자살이라는 매우 비장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직의 책임자인 거자가 생사여탈권을 가질 정도로 묵가는 조직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묵자가 초대 거자였음은 물론입니다.
   거자인 맹승은 초나라 양성군의 부탁으로 나라의 수비를 맡고 있었습니다. 패옥佩玉을 둘로 나누어 신표信標로 삼을 정도로 두 사람은 신의가 두터웠습니다. 기원전 381년 초나라의 왕이 죽고 내란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양성군은 왕실에 도전했다가 패하여 달아납니다. 초 왕실은 양성군의 봉지封地를 몰수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습니다. 『여씨춘추』의 기록은 이때의 이야기입니다. 수비를 맡고 있던 맹승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왕실의 공격을 막을 힘도 없고 그렇다고 신의를 저버릴 수도 없다, 죽음으로써 신의를 지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최후의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맹승의 결연한 태도에 대하여 제자들이 불가함을 간합니다. 자결이 양성군에게 이롭다면 죽는 것이 마땅할 것이지만 그것이 양성군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더구나 그것은 세상에서 묵자의 명맥을 끊는 일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반론에 대하여 맹승이 펼치는 논리가 묵가의 진면목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양성군과 나는 스승과 제자이기 이전에 벗이었고, 벗이기 이전에 신하였다. 우리가 죽기를 마다한다면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엄격한 스승을 구할 때 묵자학파는 반드시 제외될 것이며, 좋은 벗을 구할 때도 묵자학파는 제외될 것이며, 좋은 신하를 구할 때도 반드시 묵자학파가 제외될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택하는 것은 묵자학파의 대의大義를 실천하고 그 업業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엄정하고 결연한 태도입니다. 맹승은 송나라에 가 있는 전양자田襄子에게 거자鉅子를 넘기고 성 위에 나란히 누워 자결했습니다. 그를 따라 함께 자결한 제자가 183명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묵가의 엄격한 규율에 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묵자 다음의 거자인 복돈腹敦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돈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진秦의 혜왕惠王이 복돈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선생은 나이도 많고 또 다른 아들이 없으시니 과인이 이미 형리에게 아들을 처형하지 말도록 조처를 취해두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런 제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복돈의 대답은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해친 자는 형벌을 받는 것이 묵가의 법입니다. 이는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릇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왕께서 비록 제 자식을 사면하셔서 처형하지 않도록 하셨더라도 저로서는 묵자의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돈은 혜왕의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식을 처형했습니다.

   묵가에 대해서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한 사람은 맹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물론 『맹자』 편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묵가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만 주로 묵가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기 이론의 정체성을 확립해갑니다. 맹자는 묵가의 고결한 가치인 엄격성과 비타협성 그 자체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겸애라는 이상주의적 가치에 대해서도 그것이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것임을 비판합니다.
   『맹자』에 맹자와 제자 도응桃應의 대화가 있습니다. 도응이 질문하였습니다. 순舜이 천자로 있고 고요皐陶가 사법관으로 있는데 천자의 부친인 고수┩앎가 살인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하필 순임금과 그 아버지 고수를 예로 든 것은 부자간의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맹자의 답변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고수는 당연히 법에 따라 체포되어야 하고,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선왕의 법이기 때문에 순임금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답변입니다. 그러면 순임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 압권입니다. 이 답변이 유가와 묵가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순은 임금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몰래 부친을 업고 도망가 멀리 바닷가에 숨어 살면서 부친을 봉양하고 천하를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대답입니다. 임금의 사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처단한 묵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방식은 효孝라는 이름으로 별애別愛를 두호斗護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어』에도 유가와 묵가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섭공葉公과 공자의 대화입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에 대쪽같이 곧은 사람으로 직궁直躬이 있습니다.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그가 그 사실을 관청에 고발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의 곧은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비록 그런 일이 있더라도) 아비는 자식을 위해, 그리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감추어줍니다.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위의 예는 물론 묵가의 비타협적인 면모에 관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묵가의 사상 체계는 별애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구조, 그리고 겸애가 발현될 수 있는 구조에 대한 논의까지 망라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묵자에 대한 『장자』의 평가를 소개합니다.

   실천 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정하였다. 「비악」非樂과 「절용」을 저술하였다. 사람이 태어나도 찬가를 부르지 않으며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았다. 묵자는 만인의 사랑과 만인들 간의 이익을 말하고 서로의 투쟁을 반대했으니 그는 실로 분노하지 말 것을 설파한 것이다.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지 말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말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런 묵가의 절제는 과연 인간의 본성과 맞는 것인가? 묵가의 원칙은 너무나 각박하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도王道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묵자와 금활리禽滑釐의 뜻은 좋지만 실천은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여 종아리에 살이 없고 정강이에 터럭이 없는 것으로 서로 경쟁을 벌이게 할 뿐이다. 사회를 어지럽히기에는 최상이요 다스리기에는 최하이다. 묵자는 천하에 참으로 좋은 인물이다. 이런 사람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생활이 아무리 마른 나무처럼 되어도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정말 구세救世의 재사才士라 하겠다.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패권적 질서와 지배 계층의 사상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 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층 민중의 이상을 처음으로 제시하였습니다. 투철한 신념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대중 속에서 설교하고 검소한 모범을 보였으며,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묵자가 죽은 후에도 200여 년 동안 여전히 세력을 떨쳤지만 그 후 2천 년이라는 긴 망각의 시대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가는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준 역설적인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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