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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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


   한비자(BC. 280∼233)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한韓나라는 지금의 호남성 서쪽에 있던 나라였는데, 한비자는 한왕韓王 안安의 서공자庶公子라고 합니다. 서공자라는 것은 모계의 신분이 낮은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한비자는 55편 10만 자字의 『한비자』를 남겼는데 여기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한왕에게 간하는 글들입니다. 「고분」孤憤, 「오두」五?, 「세림」說林, 「세난」說難, 「저설」儲說 등 대부분의 논설은 그러한 동기에서 집필된 것이었습니다.

   한비자의 글에 감탄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적국인 진秦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뒤에 시황제始皇帝가 된 진왕은 한비자의 「고분」, 「오두」 같은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했다고 합니다. 당시 진왕의 막하에는 한비자와 동문수학한 이사가 있었는데 한비자를 진나라로 불러들이기 위해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흘립니다. 당연히 화평의 사자로 한비자가 진나라로 왔습니다. 시황제는 한비자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나라에 머물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시황에게 참언讒言하여 한비자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습니다. 언필칭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려진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는 또 한 번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한비자는 이사와 순자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습니다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희생되고 만 것이지요. 전국시대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는 듯합니다.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자는 눌변訥辯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따르지 못했다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한비자를 위로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비자는 그의 사상과는 반대로 매우 우직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한비자와 이사의 스승인 순자는 그 성정이 강퍅불손强愎不遜하고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기 쉽지요.

   한비자는 엄정한 형벌을 주장하고 유가와 묵가의 인의仁義와 겸애兼愛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군주의 절대 권력을 옹호하고, 군주는 은밀한 술수術數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유가의 이단인 순자와 인의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는 한비자에 대하여 부정적 평가가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한비자』를 읽어가는 동안에 그러한 선입관을 서서히 바꾸어가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왕이 한비자의 간언을 수용하지 않은 것과 반대로 진秦나라는 일찍부터 법가 사상가들이 포진하여 법가 방식의 부국강병책을 꾸준히 실시해왔습니다. 우리는 물론 『한비자』를 중심으로 법가를 읽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학파이든 그 이전의 사상이 계승되고 집대성됨으로써 학파로 성립됩니다. 법가 사상의 계보를 자세히 다룰 수는 없습니다만 선구적인 몇몇 법가 사상가는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법가 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먼저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을 듭니다. 관중은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조세租稅·병역兵役·상업과 무역 등에 있어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법가의 개혁적 성격을 가장 앞서서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나라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나라들이 다투어 개혁적 조치를 취했음은 물론입니다. 군제 개혁, 성문법成文法 제정, 법경法經 편찬 등 변법變法과 개혁 정책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예외 없이 중앙집권적 군주 권력을 강화하는 형태로 수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혁의 내용이란 실상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을 거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수 세력의 완고한 저항을 타도하기 위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 요구되었음은 물론이며 이러한 개혁에 의해서 비로소 중앙 권력이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법은 기본적으로 강제력입니다.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법일 수 없는 것이지요. 법가가 형벌을 정책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법가의 정치 형태가 중앙집권적 전제군주 국가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단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끌어낸 나라가 바로 진秦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추진한 사람은 재상인 상앙商?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진나라는 반읍국가半邑國家라고 불릴 정도로 변방의 작은 약소국이었지만 상앙에 의하여 변법과 개혁이 성공합니다. 상앙의 개혁 역시 그의 독창적 창안이 아니라 전대의 선구자였던 자산子産, 이회李냇, 오기吳起 등에 의해 시도된 변법과 개혁의 경험 위에서 이루어졌음은 물론입니다. 상앙은 먼저 성문법을 제정하고 문서로 관청에 보관하여 백성들에게 공포해야 한다는 소위 법의 공개성을 주장했습니다.

   나는 법가의 법치法治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법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앙이 강조한 행제야천行制也天입니다. 법제를 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법가의 차별성을 개혁성에서만 찾는 것은 법가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법의 공개성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상앙은 핵심적인 것을 놓치지 않은 뛰어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법 관청을 설치하고 사법 관리를 두어 존비귀천을 불문하고 법을 공정하게 적용한다는 형무등급刑無等級의 원칙을 실시했습니다. 이것은 귀족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을 폐지하고 군주의 절대 권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상앙은 법에 대한 신뢰와 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엄벌주의嚴罰主義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그것은 필부필부匹夫匹婦라 하더라도 반드시 상을 내리고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림으로써 법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었으며, 엄벌로써 일벌백계를 삼아 불법과 법외法外를 없앤다는 원칙이었습니다. 형刑으로 형刑을 없애는 이형거형以刑去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법가적 방식에 의해서만이 감히 법을 어길 수 없고(民不敢犯) 감히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民莫敢爲非) 사회, 즉 무형無刑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논어』를 읽을 때 이목지신移木之信의 일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기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무를 옮긴 사람에게 천금을 줌으로써 국가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을 없앴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 주인공이 바로 상앙입니다. 상앙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만 법가 이해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비자』를 읽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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