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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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가를 끝으로 고전 강독을 마칩니다. 강의 첫 부분에서 이야기했듯이 동양고전은 5천 년 동안 쌓여온 것으로 엄청나기가 태산준령입니다. 우리의 강좌는 호미 한 자루로 그 앞에 서 있는 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위를 좁히고 우리의 주제와 관계 있는 예시문에 한정하여 읽었습니다. 그나마 내가 섭렵한 고전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고전 강독을 끝내자니 미진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계론關係論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緣起論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불교 사상에 대해서는 다행히 여러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좋은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근대사회에 대한 성찰적 접근에 있어서도 탁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관심만 있다면 이 부분의 연구 성과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 관한 논의 이외에 또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관한 것입니다. 송대의 신유학은 1천여 년에 걸쳐서 동양적 정서와 사유 구조를 지배한 소위 주자학朱子學입니다. 더구나 이 송대 신유학의 성립은 그 자체가 당면한 사회문제에 대한 절박한 논구論究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隋, 당唐 이후 광범하게 퍼진 불교 문화와 특히 선종禪宗 불교로 말미암아 야기된 사회적 이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동양고전 강독에서는 이 두 주제에 대한 논의가 빠질 수 없습니다. 불교 사상의 관계론 부분과 신유학의 사회적 관점을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범위가 엄청난 것일 뿐 아니라 나의 역량을 넘는 것입니다. 부득이 우리의 주제와 관련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그 의미를 지적하고 이론적 소재素材로서 언급하는 것으로 끝마치려고 합니다.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覺)입니다. 불교의 사상 영역을 연기론과 깨달음으로 한정하는 것 자체가 불교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단 이 부분에 한정하기로 합니다.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華嚴 사상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범어로는 Mahavai plya-buddha-ganda-vyuha-sutra입니다. 이 명칭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대大는 절대적 대의 개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념입니다. 방광方廣은 글자 그대로 넓다는 뜻입니다. 공간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따라서 ‘대방광’大方廣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불佛을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됩니다. 그리고 불佛은 붓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붓다입니다. 화엄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 갖가지의 꽃으로 차린다는 뜻입니다. 경經을 수식하는 형용사구입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를 정리한다면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풀이됩니다. 공식적인 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방광불화엄경’의 문자적 의미가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를 높임으로써 붓다의 진리를 더욱 장엄하게 선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화엄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엄이라는 의미에서 불교 철학의 핵심을 읽을 수 있으며 또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엄이란 꽃(華)이 엄숙하다(嚴)는 뜻입니다. ‘잡화엄식’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된 세계를 화엄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이 세계가 고해苦海가 아니고 꽃으로 장식된 화엄의 세계인가에 대하여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의문에 철저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꽃으로 장식된 것은 세계가 아니라 부처님 말씀이라고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은 고해를 화엄 세계로 바꾸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엄은 세계에 대한 설명이어야 합니다.

   왜 고해가 아닌 화엄의 세계인가? 나는 그 비밀이 바로 ‘대방광불’大方廣佛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방’은 최고最高의 법칙이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광의 최대 개념이 무한한 우주와 같은 넓이의 개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단순한 사고입니다. 마땅히 우리의 사고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해야 합니다. 만약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큰 것이고 충분히 넓은 것입니다.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은 붓다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깨닫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지요. 바로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는 바로 이 연기의 구조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붓다가 설하는 법法이 바로 이 연기의 세계를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이지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수천태隋天台 당화엄唐華嚴이라고 일컫는 까닭은 이러한 화엄 사상이 당나라 전 시기에 난숙하게 꽃피었기 때문입니다. 이 화엄학의 핵심이 바로 연기론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전을 읽어온 기본적 관점이 바로 관계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입니다.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覺이란 이 연기의 망網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分別智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集合表象, 즉 업業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 깨달음의 문제는 우리가 이번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해온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그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구조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를 포섭하고 있는 문화적 기제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 시대의 지배 담론이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깨달음을 다짐해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 자체”(ding an sich)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合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건들의 극소수만이, 그 극소수의 극히 작은 부분들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들은 우리가 그 전체를 볼 수 없는 거대한 과정 위에서 생멸하는 작은 점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은 점들에 대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점들이 의식된 또는 의식되지 않은 다른 사건들로부터 독립적으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떤 것은 원인이고 어떤 것은 결과라고 판단합니다. 해체解體 철학의 논리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원천적 협소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정체성은 애초부터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벽암록』碧巖錄의 제2칙에서 조주趙州 스님은 사람들(衆)에게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로지 간택揀擇을 경계할 따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경우 간택이 바로 분별지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묵자가 슬퍼했듯이 ‘국역유염’國亦有染, 나라 전체가 물들어 있기 때문에 국가와 체제가 쌓아놓은 거대한 벽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깨달음(覺)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 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천帝釋天의 그물망(Indra’s Net)에 있는 구슬의 이야기입니다.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또다시 다른 보석에 비치고, 당연히 그 속에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영상이 다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緣起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상생相生의 개념이라고합니다. 연緣하여(pratitya) 일어나는(samutpada)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를 보는 것이 바로 법法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무 두 개를 마찰하면 연기煙氣가 일어납니다. 이 경우 연기는 나무에 의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가 사라지면 연기도 사라집니다. 연기는 나무와 상의상존相依相存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연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실체론적 존재가 아니며 관계론적 생성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목상마’二木相摩의 비유입니다.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는 결과(果)이며 나무는 원인(因)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果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의 상마相摩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이 사라지면 나무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을 불이무이不二無異라 합니다.

   현대 철학 특히 해체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자기 해체적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본질은 오로지 ‘관계 맺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현상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잠정적 동거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해체론의 핵심 논점입니다. 이러한 해체론적 논의 구조와 비교해볼 때 불교 철학이야말로 존재론에 대한 가장 과격한 해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를 연기緣起로 파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를 연기煙氣처럼 무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 사상은 모든 생명과 금수초목은 물론이며 흙 한 줌, 돌멩이 한 개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의미를 부여하는 화엄학이면서 동시에 모든 생명의 무상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화엄과 무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불교 속에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해체 철학의 진보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성이란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언어가 어떤 지시적 개념이듯이 삼라만상이 어떤 지시적 표지標識로 공동화空洞化됨으로써 가장 철저한 관념론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실제로 수隋 당唐 이래로 선종 불교가 그 지반을 널리 확장해가면서 이러한 의식의 무정부성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그 의미를 규정하고자 하는 송대의 신유학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물론 최대한의 거대 담론 체계에 있어서 금수초목은 물론 인생사 모두가 덧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화엄의 찬란한 세계이면서 동시에 덧없는 무상의 세계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한계 내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우리의 생각을 조직하고 우리의 시공에 참여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의가 다음에 검토하는 신유학을 통하여 조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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