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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다음 구절은 곡속장觳觫章의 일절입니다. 원문을 다 싣기에는 너무 길어서 앞뒤를 자르고 가운데만 살려서 실었습니다. 앞뒤로 잘린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지요.

   제선왕齊宣王이 맹자에게 춘추전국시대의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선왕의 이 물음에 대하여 맹자는 매우 부정적으로 대답합니다. 무력으로 패자가 되었던 제환공과 진문공에 대하여 공자의 제자들 중 누구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으며, 맹자 자신도 들어본 일이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王道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왕도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며 이러한 왕도로 통일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설파합니다.
   그러자 선왕이 자기와 같은 사람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물음에 대하여 맹자는 자신 있게 “가”可라고 대답합니다. 선왕이 그 까닭을 묻자 맹자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예문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지요.

   臣聞之胡齕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曰 牛何之
   對曰 將以釁鍾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觫若 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癈釁鍾與 曰 何可癈也 以羊易之
   不識有諸        ―「梁惠王 上」
   신은 호흘胡齕이라는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大殿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釁鍾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맹자가 제선왕에게 왕도를 실천할 자질이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 한 질문입니다. 먼저 제선왕의 신하인 호흘한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제선왕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질문에 대한 선왕의 답변과 맹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왕: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인색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왕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왕: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齊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맹자: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以小易大) 하셨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어찌 왕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 있습니까(牛羊何擇焉)?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재물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닌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맹자: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금수禽獸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가 푸줏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동물에 대한 측은함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징역살이를 10여 년쯤 하게 되면 얼굴만 봐도 죄명과 형기刑期를 정확하게 맞히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성격이나 학력, 직업까지 맞힐 수 있게 됩니다. 감옥의 인간관계는 바깥 사회의 인간관계와는 판이합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몇 년 동안 같은 감방에서 지내다 보면 그 사람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이 사람에 대한 판단을 매우 정확하게 만들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소하고 난 이후에 사회에서 내가 그런 사람 보는 능력을 자주 사용하는 곳이 바로 지하철입니다. 저는 꼭 앉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앉을 수 있습니다. 누가 어디서 내릴 건지 정확히 짚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승객이 너무 많지 않아서 앉아 있는 사람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여러분도 연습하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이대역에서 내릴 사람과 서울역에서 내릴 사람은 구별이 어렵지 않지요? 그런 쉬운 문제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경험을 쌓아가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창밖을 자주 내다본다고 해서 곧 내릴 사람이라 기대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눈 감고 있다고 해서 종점까지 가는 사람이라고 포기해서도 안 되지요. 매우 종합적인 판단력을 길러야 합니다. 사람의 인상, 옷차림, 소지품, 그리고 각 전철역의 사회 문화적 특성은 물론이고 현재 시간에 이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유에 대해서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나는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앉을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앉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1호선 인천 가는 전철이었어요. 영등포역에서 승차했는데 몹시 피곤하기도 하고 두 시간 강의를 앞두고 있어서 전철 속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도림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 그 앞에 섰습니다. 정확하게 신도림역에서 그 사람이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막 앉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사람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재빨리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자기 자리에는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를 앉히는 거였어요. 거기까지는 예상치 못했던 거지요. 나는 엇비슷이 두 사람 걸치기를 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의 정면에 서서 그 좌석에 대한 확실한 연고권을 주변에 선언해두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내 주변에는 나와 경쟁 상대가 될 만한 나이 든 사람도 없었거든요. 태무심으로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 앞에 선 채로 나는 매우 착잡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때 떠오른 것이 이 곡속장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여자와 내가 만난 적도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를 승차한다고 합니다. 승객들은 평균 열 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群集일 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치恥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잠시만 지나고 나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무관심과 냉담함을 도시 문화의 속성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밀집해 있는 도시라는 과밀 공간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과밀 공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 문화 역시 자본주의가 만든 것입니다. 도시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식인 셈이지요.

   인류 5천 년 역사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가 도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비인간화되는 정도에 있어서 자본주의 사회는 노예제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합니다. 물론 노예제도란 그 자체가 억압적 제도임이 사실이지만, 관계 그 자체가 소멸된 구조는 아니지요. 더구나 그리스―로마의 경우, 일부 광산 노예나 갤리선 노예 등이 담당했던 노동은 오히려 특수한 경우이며, 오늘날의 경찰·행정·교육 등을 노예 계급이 담당했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가내노비家內奴婢는 물론이고 외거노비外居奴婢도 매우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인간관계는 외견상으로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매우 광범하게 열려 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데 있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商品社會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전체적인 사회 구성에 있어서 전 자본주의前資本主義 부문도 온존하고 있으며 비자본주의非資本主義 부문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부문에 주목하고 이 부문을 진지陣地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적 과제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 자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 자본주의, 비자본주의 부문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인 화폐 관계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일회적 화폐 관계가 전면화되고 있는 인간관계는 사실상 인간관계가 황폐화된 상태이며, 인간관계가 소멸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타자화되어 있는 상태이며 ‘불인인지심’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지요. 지하철에서 있었던 작은 사건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이야기를 하나 더 하지요.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려준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보았지요. 물론 잘 아는 젊은이였지요.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참으로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이건 서울의 지하철이건 젊은이들이 만들지는 않았지요. 노인들이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똑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모스크바의 젊은이와 서울의 젊은이가 판이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똑같은 사실관계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는 까닭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신도림역의 지하철 좌석 이야기는 동시대의 횡적인 인간관계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모스크바의 젊은이와는 판이한 우리나라 젊은이의 대답은 인간관계가 세대 간에 어떻게 단절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대 간의 관계가 그만큼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는 종횡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곡속장을 통하여 반성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맹자는 제선왕이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 사실을 통해 제선왕에게서 보민保民의 덕德을 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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