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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을 원천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막스 베버에 대하여 언급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스 베버는 동양 사회의 정체停滯가 바로 이 현실주의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버의 동양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적 의미 이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이곳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한마디로 적게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여 자본 축적을 이루어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 제도를 가능하게 했다는 논리입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금욕주의가 바로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라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양적 현실주의에는 바로 이 합리적 제어 장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근검절약이라면 오히려 거꾸로 된 주장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낭비 체제를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양 사상이 비록 윤리적 차원의 현실주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주의가 곧 현세에 대한 탐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기서 자본주의가 과연 프로테스탄티즘의 근검절약에 의해서 성립하고 발전해왔는가,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기준으로 동서양을 비교하는 방식이 근본에 있어서 비대칭적 구조가 아닌가를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버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를 개진한 것이기보다는 자본 논리를 합리화하는 맥락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동양 사상에 대해 저급한 이해의 층위를 드러냈을 뿐이지요. 다만 그처럼 예찬한 자본 축적 과정이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과연 어떠한 비극으로 점철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베버는 최소한의 전망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양 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은 베버가 옳게 지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주의를 현세적 향락과 체면의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 무리인 것이지요.

   동양 사상은 물론 사후死後의 시공時空에서 실현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세를 신의 소명(Beruf, Calling, Vocation)과 직선적으로 연결시키는 단선적인 신학적 사유 체계가 아닙니다. 비종교적이고 현실주의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버의 주장이 틀린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형식주의와 체면에 대하여 지적한 것 역시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담겨 있는 의미를 온당하게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지요. 체면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관계를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체면은 사회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형식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를 일정하게 사회화해야 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일정한 형식이 요구됩니다. 어떤 형식을 부여하여 전범典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종교적 형식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형식은 불가피하게도 어느 정도의 부정적이고 경직된 측면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베버의 체계에는 동양 사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관계론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고 있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과 수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착?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도의 어원에 대한 논의도 많습니다. 도道는 도導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경우의 도導는 이민족의 머리를 손에 지니고 재액災厄을 막으며 선도先導하여 적지敵地로 나아가는 의미라고 합니다. 대단히 무서운 글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도道가 도덕적 의미로 사용된 예는 『서경』書經에 와서야 처음 그 용례가 발견되고 있으며, 도의 의미를 철학을 의미하는 이른바 존재에 대한 인식 방식이나 나아가 형이상학적 의미로 발전시킨 것은 장주莊周 일파의 철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원이나 용례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도는 그것이 철학이든 도덕이든 어느 경우에나 도로와 길의 의미입니다.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서양의 철학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이 조각은 턱을 고이고 앉아서 묵상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묵상적인 자세가 상징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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