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 (8) 봉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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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8) 봉하마을
신영복 | 성공회대 석좌교수
 
ㆍ작은 묘역에 울리는 커다란 함성 사람사는 세상

봉하로 가는 길은 멀었다. 봉하가 멀다는 것은 물론 거리 때문만은 아니지만 지난 2일 서울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그야말로 고속으로 달려 오후 1시경에야 겨우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멀고 작은 시골 마을이 지금은 연간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변방의 창조성을 이처럼 분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 달리 있을 것 같지 않다. 온 국민이 오열했던 비극의 현장, 작은 고인돌 하나로 남은 묘역이 그 변방의 고독을 떨치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변방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봉하 묘역에는 주중임에도 불구하고 참배객들이 끊임없이 당도하고 있었다. 나는 49재 이후 3년 만의 참배이다. 묘역은 이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김경수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으며 박석 길을 따라 걸었다. 헌화 분향 그리고 작은 비석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차마 부엉이 바위를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위에 그가 서 있을 것 같았다. 글씨를 취재하러 온 방문 목적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묘석 앞에 이르러 문재인 이사장이 강판에 새겨진 글씨에 관해서 설명을 시작할 때까지 내내 그랬다. 문 이사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또 2009년 5월로 돌아가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전 6시40분쯤 봉화산 바위에서 뛰어내리신 것으로 보입니다”로 시작되어 “가족들 앞으로 짧은 유서를 남기셨습니다”로 끝나는 그의 발표문 낭독을 다시 한 번 듣는 듯하였다. 최소한의 사실을, 최대한의 절제된 감정으로 전해주던 음성이 또렷이 되살아난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납득할 수 없고, 분석이 허용되지 않는 사실을 담는 그릇이다. 무어라 이름붙일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이곳의 ‘작은 비석’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걸어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운명의 의미가 더욱 증폭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변방의 작은 묘역이 새 시대의 창조공간으로 거듭 나리라는 것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봉하마을.jpg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비석 받침판에 신영복 교수가 쓴 노 전 대통령의 어록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우리의 현대사에서 광주와 노무현은 시대를 가르는 아이콘이다. 누구도 광주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듯이 누구도 노무현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 이전과 그 이후를 확연히 나누는 역사의 분기점이 아닐 수 없다. 500만 애도의 물결이 보여준 것은 한 마디로 ‘회한(悔恨)’이었고 ‘각성(覺醒)’이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회한이었고 권력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를 깨닫고, 좋은 정치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통절한 ‘각성’이었다. 이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환(生還)하는 것이 바로 그 회한과 각성이었다.

내가 쓴 글씨는 묘석을 받치고 있는 강판 앞부분에 새겨져 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적 역량입니다.” ‘작은 비석위원회’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 중에서 뽑은 글귀이지만 놀랍게도 이 묘비문 역시 ‘각성’을 호소하고 있다.

나는 묘석을 돌아 나오면서 다시 애도 인파의 함성을 듣는다. 묘역을 가득히 덮고 있는 박석의 추모 글이 저마다 함성이 된다. 그 함성과 함께 골목골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사각형 박석으로 마을의 골목길을 재현해 놓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치는 함성 같기도 하고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자바위의 포효 같기도 하였다.

묘역을 돌아 나오면서 그제야 묘역 초입의 삼각형의 수반(水盤)을 만난다. 봉화산에서 내려온 물이 박석의 추모 글들을 싣고 이곳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어디론가 떠나간다. 고여 있는 물 같지만 삼각형의 꼭짓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잠들지 않는 물’이다. 그 물 속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별자리가 조명등으로 빛나고 있다.

사자바위에 올라 묘역을 조감(鳥瞰)하면 이러한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묘역은 과연 긴 삼각형의 비행체가 되어 노무현의 별자리를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20111202_봉하마을방명록.jpg 신 교수가 지난 2일 노 전 대통령 묘역 참배에 앞서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있다. | 정지윤 기자


<대통령의 무덤>을 출간한 건축가 승효상은 서문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을 인용하며 노무현을 스스로를 추방한 자라고 썼다. 그렇다.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추방한 자가 바로 노무현이다. 지식인은 자기의 계급을 선택하는 계급이라고 한다. 노무현이야말로 ‘사람다운 삶’을 자기의 삶으로 선택한다. 변호사,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정점에 서 있는 동안에도 언제나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변방으로 추방한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망국의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의 죽음마저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추방이다. <운명이다>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꿈을 짓밟는 상황으로 몰리고 그 꿈을 함께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누가 되는 상황으로 떠밀리자 자신을 던진다. 자신의 삶 자체를 추방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변방의 작은 고인돌 하나로 남아 있는 이곳에 해마다 100만이 넘는 추모객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봉하 묘역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해후의 자리이면서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는 도약의 자리였다.

인류문명사는 변방이 다음 시대의 중심이 되어온 역사이다. 오리엔트 문명은 변방인 지중해의 그리스 로마로 그 중심을 옮겨간다. 그리고 다시 갈리아북부의 오지에서 합스부르크왕조 600년의 문화가 꽃핀다. 그리고 근대사의 중심부는 해변의 네덜란드와 섬나라 영국으로 옮겨가고, 다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으로 이동한다.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변방으로, 변방으로 그 중심을 이동해 온 것이 인류의 문명사였다. 동양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중국은 황하유역을 중심부로 삼아 공간적 이동이 없다고 반론하지만 중국 역사 역시 고대의 주(周), 진(秦)에서부터 금(金), 원(元), 청(淸)에 이르기까지 변방이 차례로 중심부를 장악한 역사였다. 그러한 변방의 역동성이 주입되지 않았더라면 중국문명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20111228_신영복_문재인.jpg 신 교수와 문재인 이사장이 노 전 대통령 사저에서 대통령 재직시절 신 교수가 선물한 ‘우공이산’ 글씨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 노무현재단 제공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한 결정적 전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새로운 창조공간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아류(亞流)로 낙후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참배를 마치고 사저(私邸)에 들러 봉하를 찾아온 까닭을 말씀드리고 권양숙 여사의 안내를 받아 ‘사람 사는 세상’ 앞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문재인 이사장은 참여정부 마지막 장·차관 모임 때 노무현 대통령이 이 글씨를 부탁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가 떠난 사저에 걸려 있는 글씨가 다시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사저에는 또 한 개의 내 글씨가 남아 있었다. ‘愚公移山’이다. 우공이산은 아흔 살이 넘은 우공이라는 노인이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옮기는 고사이다. 지수(智수)라는 사람이 그 어리석음을 비웃었지만 그는 자기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자자손손이 이어가면 언젠가는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우직한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천상의 옥황상제가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산을 옮겨주었다는 고사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옥황상제가 옮겨주었다는 부분을 민중이 각성함으로써 거대한 역사를 이룩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노 대통령이 퇴임한 후 자신의 아이디를 ‘노공이산’(盧公移山)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인가를 몸소 절감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대통령의 자리가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적절한 자리인가를 고민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새 시대의 맏형이 되지 못하고 구시대의 막내가 된 것을 개탄했다. 우공의 우직함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멀고 먼 봉하의 작은 비석에서 깨닫는 것은 이 변방의 작은 묘역이 바야흐로 새로운 ‘시작’을 결의하는 창조공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 사는 세상’과 ‘좋은 정치’와 ‘좋은 대통령’을 공부하는 교실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봉하를 떠나오면서 생각했다. ‘변방을 찾아가는 길’이란 결코 멀고 궁벽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성과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변방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것이 봉하에서 우리가 받는 위로이며, 세상의 모든 변방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희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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