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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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책머리에


이 책은『경향신문』에 연재한 ‘변방을 찾아서’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내가 쓴 글씨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그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글이다. 모두 8회의 연재로 마감했기 때문에 분량이 많지 않다. 연재를 계속하기를 원하는 독자들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책 한 권 분량으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책으로 만들자는 요구가 있어서 그것을 묶어 책을 만들었다.

이번 취재를 통해서 그동안 내가 쓴 글씨들이 생각보다 많은 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신문에 실리는 글이기 때문에 선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번에 찾아간 곳 외에도, 독자들과 함께 그 의미를 공감할 수 있는 글씨들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하다. 언젠가 조용히 찾아가려고 한다.

연재 글을 읽은 독자라면 ‘변방을 찾아서’라는 기획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취재 대상을 선정하는 기획 단계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쓴 글씨들이 대체로 ‘변방’에 있었다. 그래서 기획연재의 제목이 자연스럽게‘변방을 찾아서’가 되었다. 지역적으로 도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그곳의 성격 또한 주류 담론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내게 글씨를 부탁했던 사람들도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도 했을 것이다. 이번 취재에서 빠지긴 했지만 아마 내 글씨가 가장 많은 곳이 민주 열사 묘비와 대학의 추모비일 것이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산화한 사람들이 역사의 변방이 아님은 물론이다. 열혈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의 의미를 단지 주변부의 의미로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천박한 관점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난 몇 개월 동안 ‘변방을 찾아서’ 매번 먼 곳, 먼 길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해남의 땅끝마을이었다. 완벽한 변방이다. 해남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의 교실에 ‘꿈을 담는 도서관’이란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서울공화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땅끝임에 틀림없고, 정치적·경제적으로 낙후해 가는 농촌이며, 폐교 직전의 시골 초등학교 그것도 분교였다. 현판이 걸려 있는 곳도 사람들이 자주 찾는 커피숍이 아닌 도서관이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강릉의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역시 변방이었다. 허균(許筠, 1569∼1618)과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조선 시대의 변방이었을 뿐 아니라 강릉을 대표하는 오죽헌(烏竹軒)의 변방이었다. 소설『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역적 죄로 처형당했다. 그의 누이 허난설헌 역시 조선에 태어난 것을 한(恨)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며 스물일곱 나이로 요절한 불우한 시인이다. 허균, 허난설헌 남매는 그들이 살았던 당대 사회의 변방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멀지 않은 곳에 성역화되어 있는 오죽헌의 율곡(栗谷 李珥, 1536∼1584)과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에 비하면 여전히 완벽한 변방이다. 신사임당은 성공한 학부모의 모델이며 율곡은 엄친아의 표본이다.

‘박달재’는 찾는 사람도 없었다. 「울고 넘는 박달재」의 구성진 노래만 주변 산천을 가득히 울렸다. 그 애절한 가락과 노랫말은 그곳을 500년 전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터널이 뚫려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동차로 박달재 밑을 관통하고 있을 뿐 고개에 오르는 일이 없다. 박달재를 일부러 찾는 사람들 외에는 발길이 끊어진 고개이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의 이야기도 까마득히 잊혀진 옛날이야기이다. 하물며 박달과 금봉이의 애달픈 순애보는 더 이상 없다.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박달재는 오늘의 삶을 돌이켜 보게 하는 변방 특유의 관점을 갖는다. 박달재 밑의 어두운 터널을 직선으로 통과하여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사랑이 상품처럼 간단하게 소비될 수 있는 오늘의 메마른 정서가 애달픈 사랑에 통곡하는 금봉이를 만나 서로 마주 보며 낯설어한다. 변방의 거울이 이와 같다.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비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먹빛이 바래어 있었다. 우선 비문에 먹을 넣는 일부터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잊혀진 비였다. 현란한 영상의 시대에 문학의 위상 자체가 변방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 현대사의 도도한 반공, 반북 논리 속에서 월북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의 문학비는 설 자리가 없다. 비가 서 있는 장소도 그랬고 비의 크기도 작았다. 작가회의 회원들이 뜻을 모아 어렵게 벽초 문학비를 세우자 금방 비를 깨뜨리겠다는 보훈단체의 항의에 직면하게 된다. 월북한 인사일 뿐 아니라 북에서 부수상까지 역임한 그의 경력이 문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벽초의 일생을 기록한 문학비 뒤편의 해설문을 문제 삼았다. 평생을 애국한 사람이 아니라는 반론이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애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월북 이후는 애국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문인들에게는 ‘선생’이지만 자신들에게는 결코 선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평생’과 ‘선생’이라는 단어를 빼라는 요구였다. 작가회에서도 거기까지는 수용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전범’(戰犯)이라는 표현을 삽입하라는 요구에는 응할 수 없었다고 했다. 문학비 건립위원들은 청주 MBC에서 방영된 전(前) 노동당 비서 황장엽의 증언을 들어 벽초는 최고회의에서 끝까지 전쟁에 반대한 사실을 제시했지만, 보훈단체 인사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깨뜨리게 하든가 묻어 버리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했다. 결국 ‘평생’과 ‘선생’이란 표현을 지우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고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남아있기는 했지만 문학비가 서 있는 제월대 광장은 펜션의 주차장으로 변하여 찾기도 쉽지 않았다. 벽초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비문까지도 먹빛이 바래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잊혀져 가고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임꺽정』이다. 장편 대하소설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벽초의 소설『임꺽정』만 남아 있다. 그것도 괴산의 고추 홍보 캐릭터로 남아 있다. 버스 터미널 옥상에 고추를 들고 있는 임꺽정의 캐릭터가 눈에 띈다. 거리의 가로등에도 고추와 임꺽정이 올라서 있다. 정작 소설『임꺽정』의 작가가 누군지『임꺽정』의 문학적 위상이 어떤 것인지는 관심이 없다. 고추를 먹으면 임꺽정처럼 힘이 넘친다는 마케팅의 소재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벽초와『임꺽정』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다. ‘오래된 미래’이다. 좌우를 아울렀던 벽초의 유연한 사고와 진정성이 그렇고, 임꺽정과 그의 동무들이 보여 준 노마디즘(nomadism)의 삶이 그렇다.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분명 변방의 작은 공간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그것은 탈냉전과 탈근대의 장(場)이다. 평화와 공존의 철학을 앞서서 보여 주고, 영토와 소유의 협소한 틀을 깨뜨리고 미련 없이 흘러가는 ‘길 위의 삶’을 앞당겨 보여 준다. 한마디로 미래 담론의 창조 공간이다.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전’은 막상 상원사를 찾아가는 아침까지도 글 쓸 일이 걱정이었다. 상원사라는 조계종 사찰의 대웅전 현판을 변방과 연결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불교는 한국 최대의 종단이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의 고민은 문수전 현판이 상징하는 ‘지혜’(智慧)의 변방성에 관한 것이었다. 지혜란 깨달음이고 깨달음의 세계는 한없이 넓고 깊다. 그 넓고 깊은 세계의 중심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변방이라 하자니 참으로 난감했다. 그러나 막상 상원사에 도착하여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리고 사찰을 찾아온 불자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차츰 생각의 갈피가 잡히기 시작했다. 역시 현장의 역동성이었다. 내가 그동안의 경험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료 수집과 집필 구상 등 준비를 많이 할수록 틀에 갇힌다는 사실이다. 쌓여 있는 자료가 선입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입관 때문에 결국 새로운 것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 여행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성(城)을 벗어나는 해방감이 생명이다. 부딪치는 모든 것들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없다면 여행은 자기 생각을 재확인하는 것이 된다.

오대산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내려놓게 했다. 우선 고속으로 달려온 우리들을 무색케 했다. 그 품에 안겨 있는 모든 것들이 더디고 말이 없었다. 노구를 이끌고 산사를 찾아온 불자들의 모습도 어느새 산을 닮아 있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는 듯 그분들의 눈길은 하나같이 자신의 내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울에는 없는 눈빛이었다. 단풍철도 지나 을씨년스런 산사의 풍경이 보여 주는 것은 놀랍게도 ‘서울’이었다. 어둠이 북극성을 보여 주듯이, 지혜의 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에 날개를 펴듯이 변방은 변방 특유의 조망(眺望)을 가지고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소유의 사회에서 무소유의 주장은 비현실 그 자체이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정보사회에서 결코 디지털화할 수 없는 ‘지혜’라는 이름의 고독한 깨달음이 설 자리는 없다. 무소유든 지혜든 그것의 결정적인 결함은‘상품’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상품이 못 되는 것은 팔리지 않고, 팔리지 않는 물건은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무소유와 지혜는 팔리지 않으면서도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팔리지 않는다는 그 역설적 반(反)시장 논리가 상품의 허상을 드러내면서 스스로 그 대척점(對蹠點)에 선다. 무소유는 소유의 물질성을 제거하고 지혜는 반대물인 우직함으로 전화(轉化)한다. 그것이 바로 변방의 지혜일 것이다.

이번의 변방 여행에서 느끼는 감동은 변방 개념의 일정한 발전이었다. 변방을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변방에 대한 오해이다. 누구도 변방이 아닌 사람이 없고, 어떤 곳도 변방이 아닌 곳이 없고, 어떤 문명도 변방에서 시작되지 않은 문명이 없다. 어쩌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변방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다름 아닌 자기 성찰이다.

용과 고래의 한판 승부라는 타종의 엄청난 굉음을 좇아가 이윽고 도달한 곳은 묵언(默言)이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소리의 뼈는 침묵이었다. 충격에서 시작하여 긴 여운을 거쳐 정적으로 끝나는 생성과 소멸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탈주와 접속의 장(場)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혜는 자기와의 불화(不和)이고 시대와의 불화이다. 지혜가 고요와 깨달음의 초월 공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에 대한 오해이다. 마찬가지로 무소유 역시 사회와의 불화이다.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격리시켜 주는 소유라는 이름의 요새(要塞), 그 완고한 요새를 향한 싸움이다. 성채가 무너지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고립(孤立)이고, 둘째는 내분(內紛)이다. 고립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며, 내분은 더 큰 소유를 부르는 자기 논리 때문이다. 소유는 소유를 부르고 불안은 불안을 낳기 마련이다. 소유란 사람과 물건이 맺는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내는 관계이다. 물건을 다른 사람의 접근으로부터 차단하는 격리와 고립이 소유이다. 더구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 자체가 외딴 섬이 아니다. 인도의 변방을 지키고 있던 간디(Gandhi, 1869∼1948)에게 있어서 진보〔progress〕는 단순화〔simplification〕였다. 그리고 제자 번지(樊遲)의 물음에 대한 공자(孔子)의 답변에서 지혜〔知〕는 인간 이해〔知人〕였다.

전주에는 전북대학교 교정에 이세종(1959∼1980) 열사의 추모비가 있고, 또 전북대학교에서 10여 분 거리의 덕진공원에 김개남(金開南, 1853∼1895) 장군의 추모비가 있다. 마석의 모란공원과 서울의 여러 대학교 교정에 내가 쓴 묘비가 많지만 멀리 전주에 있는 추모비를 찾아간 까닭은 묘비명에 담겨 있는 간절한 목소리 때문이다.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에는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묘비명은 이세종의 학우였고 계엄군이 난입하던 날 밤에 전북대학교 학생관에 함께 있었던 김성숙 선생의 글이다. 자기가 이세종이라면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하면서 지은 글이라고 했다. 마침 청명한 가을이어서 가을볕을 담뿍 받고 있는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는 글귀는 이세종의 육성이었다. 그리고 전북대학교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김개남 장군 묘비명도 마찬가지였다. ‘개남아’를 반복해서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새겨 놓은 것이다. 당시 널리 불렸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대구이기도 하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라는 묘비명에서는 수천 군사를 휘몰아 거칠 것이 없던 김개남 장군이 새끼줄에 묶여 짚둥우리가 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탄식하는 농민들을 보게 된다. 이세종 열사와 김개남 장군의 묘비명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역사의 인물이 된 사람은 오로지 역사의 화신이 될 뿐 막상 그 개인의 인간적 애환은 사라진다. 대부분의 기념비나 동상의 주인공은 역사적 대의를 부각시키는 역사 교육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당자의 인간적 애환이 제거된 대의만으로 과연 인간적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모든 교육은 인간 교육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더구나 전주는 내게 각별한 도시이기도 하다. 20년 수형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곳이기때문이다.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참으로 애환(哀歡)이 교차하는 도시이다. 출소 당일, 8월의 햇볕 속으로 걸어 나오면서 20년 수형생활은 이제 추억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것이 단지 추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전주는 내게 아픈 기억을 송별하는 별리(別離)의 장소이면서 8월의 햇볕을 만나는 새로운 시작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나의 20년 수형 생활이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파편이 몸속에 파고든 상처였다면, 그것을 일단 추억의 장으로 묻고 햇볕 속으로 걸어 나오는 출소는 비록 성한 걸음은 아니었지만 독보(獨步)였고 해방(解放)이었다. 나는 아픔이 없는 기쁨과 기쁨이 없는 아픔은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우연한 여행지라 하더라도 항상 그것이 담고 있는 빛과 그림자, 애(哀)와 환(歡)을 편견(偏見)하는 시각을 늘 불편해한다. 그것이 아마 내가 동상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전북대학교 이세종 열사 추모비를 찾아갔을 때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준 사람들은 다행히 이세종 열사의 학우들과 선배들이었다. 80년 5월 17일 밤에 학생관에서 함께 농성하던 학우들이었다. 학우들은 지금도 그날 밤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검거를 피하여 학생관을 먼저 빠져나간 선배들이 더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경찰 병력이 난입할 것이고 지명수배된 총학 간부들이 우선 검거 대상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총학 선배들이 검거를 피해 미리 학생관을 빠져나갔다. 불침번이던 이세종은 각 방으로 뛰어다니며 학우들을 깨웠고, 그것이 계엄군으로 들이닥친 공수단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학생관 옥상으로 달아났지만 결국 붙잡혀 집단 구타를 당한 뒤 추락사하게 된다. 학생관에서 그 참상을 목격한 학우들과 먼저 빠져나와 더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는 선배들이 그동안 해마다 5월 17일이 되면 어김없이 추모비를 찾아오고 있었다. 벌써 30년이 지나서 아픈 상처가 아물고도 남을 세월이지만 오히려 더욱 처연해진다고 했다. 이제는 당시 이세종 나이의 아들딸들을 둔 부모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세종은 학우가 아니라 자신의 자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추억이란 세월과 함께 멀어져 가는 강물이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숱한 사연을 계기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거듭할수록 우연(偶然)이 인연(因緣)으로 바뀐다고 하는 것이리라.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사소한 일들도 결코 우연한 조우가 아니라 인연의 끈을 따라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필연(必然)임을 깨닫는다. 잘못 배달된 편지 한 장, 길을 묻는 행인, 물 한 모금 청하는 나그네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연으로 접어 버리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마음이 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인지 모른다. 하물며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는 당자의 육성과 “개남아 개남아”를 탄식하는 농민들을 그 죽음의 현장에서 만날 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것은 결코 과거의 화석이 아니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에게 어김없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서울 시장실에 걸려 있는 〈서울〉이란 작품은 내게 매우 애착이 가는 글이다. 그러나 글씨가 있는 곳이 시장실이어서 그동안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1995년에 작품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난 후 이번이 처음이다. 17년 만에 만나는 셈이다. 서울시청은 임시 청사여서 옛날처럼 넓지도 않았다. 더욱이 박원순 시장은 시장실을 고서점 콘셉트로 꾸며서 매우 복잡했다. 그 비좁은 벽면 한 쪽에 글씨가 걸려 있었다. 아마 우리들의 취재 방문을 앞두고 시장실로 옮겨 놓은 듯했다. 취임 초기 바쁜 일정의 틈새를 비집고 방문한 우리 일행과 처지가 비슷해 보였다. 좋은 곳으로 시집가서 잘살고 있는 모습이 못 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박원순 시장의 허심탄회한 응대였다.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은 우리가 시장실을 방문한 목적이 ‘변방을 찾아서’라는 취재 방문이라는 점이었다. 1천만 서울시민의 수장인 서울시장을 혹시라도 ‘변방’으로 격하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는 달리 박 시장은 변방의 의미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바로 자신이 변방 출신이며, 역사는 변방이 중심부로 진입하는 과정이라는 역사관을 서슴없이 토로하였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서울 시정에도 시민운동이라는 변방 공간의 경험이 적극 도입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한 의지는 이를테면 서울시가 북악산의 권력이기보다는 한강수로 상징되는 민초들의 애환에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서울〉이라는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기에 한결 마음이 편했다.

〈서울〉이란 작품은 ‘서’와 ‘울’을 각각 북악산과 한강수로 형상화하고 각각의 의미를 방서로 풀어썼다. “북악무심오천년(北岳無心五千年) 한수유정칠백리(漢水有情七百里).” 북악은 왕조 권력을 상징하고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비하였다. 북악과 한수, 무심과 유정, 5천 년과 700리로 대비하여 왕조와 백성의 정서를 대치했다. 조선이 서울을 도읍으로 삼은 기간이 500여 년이기는 하지만, 북악은 우리 역사 전반에 걸쳐서 군림한 정치권력 그 자체를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그에 비하여 저 멀리 가장 낮은 곳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수는 고단한 삶을 뒤척이는 백성들의 몸부림이기도 할 것이다. 북악산과 그 일대에 위용을 자랑하는 궁궐들은 권력의 중심부이다. 권력 투쟁이 거기서 영위되는 정사(政事)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성들의 애환은 뒷전이었고 그것이 탁상에 오른 경우에도 권력 투쟁의 방편에 불과했다. 그런 북악을 멀리 두고 한강수는 유유히 흘러간다.

나는 이 작품이 서울시청에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울시는 북악보다는 한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중심이기보다는 시민들의 삶을 껴안고 흐르는 강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산수대우(山水大友)를 예로 들어 산과 물은 오랜 친구〔大友〕이기 때문에 서로 환포(環抱)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연에서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북악과 한수가 환포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한수는 북악을 신뢰하지 않고 북악은 한수의 강물 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상적인 산수의 관계는 차라리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수가 무심하고 북악이 유정해야 맞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가장 좋은 정치란 임금이 있기는 있되 그가 누군지 백성들이 모르는 경우라 했다〔太上 不知有之〕. 그렇기 때문에 북악은 유정하되 한수는 차라리 무심한 것이 좋다. 산수대우의 경우를 노자의 분류에 따라 비유해 본다면 아마 차선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이 백성을 친애하고 백성이 임금을 예찬하는 경우〔親而譽之〕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다음이 두려운 정치, 포악한 정치이며, 최악의 정치는 백성들로부터 모멸을 받는 정치이다. 불신과 조롱을 받는 정치를 최하로 본다. 오늘날의 북악과 한수의 관계가 어느 경우에 흡사한지 생각해 볼 일이다. 서예 작품으로서의 〈서울〉은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한문 서예의 경우는 한자 자체가 상형문자이기 때문에 그 내용과 형식을 일정하게 조화시키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갑골문(甲骨文)이나 전서체(篆書體)는 글자가 곧 그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글 서예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한글은 기호의 조합이다. 각박한 기호에 불과한 한글을 형상화했다는 점을 전문가들이 가장 먼저 평가해 주었다. 그리고 서울을 북악산과 한강으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그 위에 다시 무심한 왕조 권력과 민초의 애환을 대비시킴으로써 역사적 함의(含意)를 더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해 주었다.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여 서울을 주제로 한 초대전을 기획한 예술의전당 서예부 이동국 학예실장으로부터 출품 청탁을 받을 때만 해도 나는 출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서예를 본격적으로 사사받은 정향(靜香) 조병호(趙炳鎬, 1914∼2005) 선생님의 지론이 그랬다. 우리나라 역사에 서예가란 없다는 것이다. 직업인으로서는 사자관(寫字官), 녹사(錄事)가 있었을지언정 예술 작품으로서의 서예를 직업으로 하는 문화란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이었다. 붓을 일상적인 필기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에, 선비 중에 글씨를 잘 쓰고 그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사람의 글을 사람들이 애장하면서 서예가 예술성을 더해 갔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로 때문에 서예 작품은 항상 사람과 글씨가 아울러 평가되는 인문학적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인격과 무관하게 평가되는 서양 예술 작품과 구별된다는 지론을 자주 펼쳤다. 물론 당신 스스로는 서예가가 아니라 학자(學者)로 자처하셨다. 당시 우리나라 서예가로서 중국의 고궁박물관에 글씨가 소장된 유일한 분이었고,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맥을 잇고,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1875∼1947) 선생과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께 사사하신 분이었다. 완당, 원교(圓嶠 李匡師, 1705∼1777)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명필은 서예가이기 이전에 학자였고 처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서예가란 생각이 아예 없었다. 나는 서예가가 아니기 때문에 출품하지 않는다며 냉정한 거절 의사를 표했다. 그러자 이동국 실장이 며칠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서예가뿐만 아니라 사회의 저명인사들의 글씨도 초대된다고 했다. 나는 이번에는 저명인사가 아니라는 답변으로 거절했다. 저명인사가 아니기도 했지만 도리어 20년 동안 아예 이름 없이 번호로만 존재했던 기억이 났다.

그랬으면서도 결국〈서울〉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거절은 했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서울’을 주제로 한다면 어떤 작품을 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버스 속에서도 생각하고 길을 걸으면서도 생각했다. 그러다가 북악과 한강, 왕조와 민초의 애환 등 구상이 떠올라 곧 작품 제작에 들어갔고 회심의 작품을 얻게되자 출품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로 이 실장의 간곡함도 뿌리치기 어려웠다. 비록 전화 통화로만 이야기를 나눈 정도였지만 그 너머에 있는 이 실장의 진심이 전해졌다. 서예가도 아니요 저명인사도 아니라며 두 번이나 출품 요청에 응하지 않자, 그렇다면 서예가와 저명인사 반반으로 해서 출품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나중에 읽어 보게 되었지만, 이실장은 신영복 서체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여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하고 평가하는 등 대단한 애착을 보여 준 분이기도 하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23년 동안 예술의전당 학예실장으로서 우리나라의 가장 뛰어난 서예전을 기획·전시하고 있다. 이 실장의 서예에 대한 사명감은 그날 박원순 시장을 만나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디자인 수도 서울의 화룡점정이 문자문화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간판 글씨만 하더라도 문자와 영상 시대에 맞는 디자인이 필요하고 그 속에 역사가 담겨야 한다는 지론을 펼치기도 했다. 붓의 문화, 칼의 문화가 중첩되고 쌓여야 되는데 자판 문화가 과잉 상태여서 붓의 문화가 변방화되었다고 했다.

생각하면 문학 서사와 영상 서사라는 두 개의 압도적 서사 형식에서 바야흐로 영상 서사로의 대전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이동국 실장의 우려는 이 두 가지가 적절히 조화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 서사도 물론 상상력을 요구하는 이른바 ‘생각하는 영상’이 없지 않겠지만, 그러한 영상 서사 형식은 오히려 소수이고 대다수 영상 서사는 복제와 카피라는 대단히 안이한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기호로서의 한글이 이처럼 도도한 영상 서사의 환경 속에서 어떻게 서사 양식으로서의 영역을 지켜 갈 것인지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서울시청이 700리 유정한 한강수처럼 우리 시대의 변방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시민운동권 출신의 민선 시장인 박원순 시장의 변방성이 새로운 서울의 창조성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봉하마을은 서울로부터 일단 멀다는 점에서 변방임에 틀림없었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아마 노무현 대통령 이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밀양에서 자란 나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서 다섯 시간을 달려서야 도착했다. 승용차로 묘역까지 직행하는 경우가 그렇다. 49재 때에는 서울에서 밀양역까지 KTX로 와서, 밀양역에서 다시 진영행 열차로 환승하고, 진영역에서 봉하마을 입구까지 버스를 탔다. 마을 입구에서 하차한 다음 다시 7월의 뙤약볕 속을 걸어서 당도했다. 먼 곳이었다. 지금도 이곳을 찾는 참배객중의 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찾아오고 있었다. 묘역에 참배하고 나서 다시 봉화산과 사자바위까지 걷는다. 순례자가 되어 찾아오고 있었다.

‘변방을 찾아서’라는 기획 연재는 봉하 묘역을 끝으로 일단 마감하였다. 찾아갈 글씨가 여러 곳에 더 있지만 마지막 찾은 곳이 봉하 묘역이라는 점에서 마감하기에 미련이 없었다. 봉하 묘역은 그만큼 변방의 의미가 증폭되어 안겨 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작은 시골 마을의 작은 비석이 놓여 있는 묘역에 해마다 100만이 넘는 참배객이 순례자가 되어 찾아오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변방의 창조성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더구나 묘역의 주인공인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삶은 ‘스스로를 추방해 온 삶’이었기 때문이다. 낮은 곳, 변방으로 자신의 삶을 추방하는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대통령’이라는 중심에 서게 되는 그야말로 변방의 창조성을 극적으로 보여 준 삶이다. 대통령에서 하야한 다음 다시 100척 부엉이바위 위에서 자신을 투신한다. 그리고 작은 돌 한 개로 남는다. 그러나 이 궁벽하고 작은 묘역에 매년 100만의 순례자가 찾아오고 있다. 죽음의 자리가 생환(生還)의 현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난 곳에서 다시 통절한 각성과 당찬 시작이 이어지고 있음에 있어서랴.

인류사는 언제나 변방이 역사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왔다. 역사에 남아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들 역시 변방의 삶을 살았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도처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오리엔트의 변방이었던 그리스·로마, 그리스·로마의 변방이었던 합스부르크와 비잔틴, 근대사의 시작이 되었던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은 그 중심지가 부단히 변방으로, 변방으로 이동해 온 역사이다. 우리는 왜 문명이 변방으로 이동하는지, 변방이 왜 항상 다음 문명의 중심지가 되는 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변방에 대한 즉물적 이해를 넘어 그것의 동학(動學)을 읽어 내는 것이기도 하다. 동학은 운동이고 운동은 변화이다. 문명도 생물이어서 부단히 변화하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한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부단히 변화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중심부가 쇠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기술하고 있지만 중국의 역사도 변방의 역사이다. 문명의 중심이 변방으로 옮겨 간 역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대에서부터 현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변방의 역동성이 중심부로 진입하여 새롭게 만들어 온 역사이다. 치세와 난세를 거듭하는 중국사 자체가 변방과 중심의 부단한 교체이다. 현대 중국에 대한 이해의 관건 역시 변방의 창조성이다.

중요한 것은 변방이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변방성, 변방 의식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비록 어떤 장세(場勢)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변방 의식을 내면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크게 보면 인간의 위상 자체가 기본적으로 변방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광활함과 구원함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위상 자체는 언제 어디서든 변방의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 의식은 세계와 주체에 대한 통찰이며, 그렇기 때문에 변방 의식은 우리가 갇혀 있는 틀을 깨뜨리는 탈문맥이며, 새로운 영토를 찾아가는 탈주(脫走) 그 자체이다. 변방성 없이는 성찰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세상에서 생명을 부지하는 하나의 생명체로서도 그러하고, 집단이든 지역이든 국가나 문명의 경우든 조금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를 조감하고 성찰하는 동안에만, 스스로 새로워지고 있는 동안에만 생명을 잃지 않는다. 변화와 소통이 곧 생명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가장 결정적인 전제가 있다.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그야말로‘변방’(邊方)에 지나지 않는다. 중심부에 대한 허망한 환상과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하고 교조적인 틀에 갇히게 된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性理學)이 그렇다. 소중화(小中華)라는 교조적 틀에 갇혀 결국 시대의 조류에서 낙후되었던 역사가 그렇다. 그러한 콤플렉스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한반도는 그 지리적 특성에서 변방으로서의 창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뛰어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아류(亞流)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콤플렉스 때문이다. 콤플렉스는 한 개인의 경우에도 결정적이다. 그의 판단에 최후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안경 하나, 단어 한 개를 고르는 경우에도 콤플렉스는 작용하고, 헤어스타일이나 가방 하나를 선택할 때에도 어김없이 끼어든다. 무서운 것은 콤플렉스의 개입을 본인 스스로 자각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콤플렉스는 마치 잠재의식처럼 무의식을 지배한다. 한 개인의 경우도 그렇거든 하물며 사회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열등감과 콤플렉스가 사회 문화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라면 최소한 그 사회는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목표를 세우지 못한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우리가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가를 깨닫는 일이다. 유일한 위로라면 그러한 자각이 그나마 가능한 공간이 바로 변방이라는 사실이다.

조선 시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문필가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꼽는 데 이의가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연암이 16세 때까지‘글을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문맹은 아니었지만 반가의 자제가 읽어야 하는 독서량에 비해 대단히 빈약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열여섯에 장가를 들었는데 처가 쪽 사람들이 연암의 독서 수준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에게 『맹자』(孟子)를 배우고,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에게 『사기』(史記)를 배웠다는 기록이 『과정록』(過庭錄)에 전한다. 연암의 이 이야기는 오히려 『열하일기』(熱河日記)로 대표되는 연암의 창조성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연암의 어린 시절이 오히려 당시 선비들이 갇혀 있던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나 고문 투에 갇히지 않을 수 있게 하였고, 더구나 교조화된 성리학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했다. 사실은 조선의 건국 자체가 변방성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20세까지 함길도 변방에서 호복(胡服) 변발( 髮)을 한 원(元)나라 신민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의 개혁파들만 하더라도 당대 사회의 변방인이었다. 역성혁명파였든 온건개혁파였든 일단은 친원파(親元派) 권문세족과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점에서 중심부가 아닌 변방이었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 이후에 다시 갈리게 되는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의 차이도 변방과 중심부로 나눌 수 있다. 역성혁명파가 농민적 성격이 강했던 반면 온건개혁파는 지주적 성격이 강했다. 특히 신분에 있어서도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등 온건개혁파에 비하여 역성혁명파는 대체로 서얼의 핏줄을 잇고 있어서 중심부에서 한발 비켜난, 이를테면 변방 혈통이었던 셈이다. 개혁 군주 정조(正祖) 대왕의 개혁 중심 기관인 규장각의 사검서(四檢書) 이덕무(李德懋, 1741∼1793)·유득공(柳得恭, 1748∼1807)·박제가(朴齊家, 1750∼1805)·서이수(徐理修, 1749∼1802)도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당시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老論) 사대부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혁 주체가 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사실 정조 자신이 비록 임금이기는 하였으나 변방의 군주였다. 노론 집권 세력의 집요한 음해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즉위하였지만,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그들의 포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 임금이었다. 정조의 이러한 변방성이 조선조 최고의 개혁 군주, 철인(哲人) 군주의 면모로 남는 것이다.

변방은 그런 것이다. 비록 변방에 있는 글씨를 찾아가는 한가한 취재였지만, 나로서는 취재를 마감하기까지의 모든 여정이‘변방’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그런 상념을 담는 데 훨씬 못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글의 양도 부족하고 붓글씨라는 한가한 소재 자체가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글들은 독자들의 것이다. 내가 신문의 연재 글을 책으로 내는 데에 동의한 것도‘독자의 탄생’을 믿기 때문이다. 빈약한 글들은 이제 독자들의 풍부한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비상을 시작하리라고 기대한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완고한 벽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깜깜한 어둠 속을 달려가 벽에 부딪치는‘작은 소리’를 보내옴으로써 보이지 않는 벽의 존재를 알리기에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독자 여러분의 창조적 독법을 기대한다.

길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현장에서 맞아 주시고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먼 길을 함께했던 ‘변방팀’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2부 연재를 계속하지 못하고 끝내게 되어 『경향신문』의 편집국장님을 비롯하여 편집부 여러분께 죄송한 말씀을 드린다.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내느라 고생하신 돌베개 편집부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사실은 취재 마지막 즈음에는 나 역시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정도였음을 밝힘으로써 그간의 죄송함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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