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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6)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김개남 장군 추모비
전주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ㆍ갑오년 그리고 80년 5월, 그들의 혁명은 실패가 아니다

전주는 20년 수형 생활의 마지막 3년을 보내고 출소한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전주는 내게 커다란 햇볕이다. 교도소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올 때 온몸에 쏟아지던 그 8월의 햇볕이다. 신문지만한 햇볕 한 장 무릎에 얹고 마냥 행복해하던 겨울 옥방의 그것에 비하면 8월의 뜨거운 햇볕은 환희였고 생명이었다. 그리고 전주교도소에는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노래 ‘떠나가는 배’가 그것이다. 출소 일주일 전쯤 우리는 신입자로부터 이 노래를 배우게 된다. 그러다가 석방 이틀 전 가족접견 때 은밀한 출소 소식을 듣는다. 우리 감방에서 내가 가장 오래 복역했지만 차마 출소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된다.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내게 전주는 햇볕과 평화의 땅이었다.

그러나 오늘(지난달 28일) 전주행은 마음이 무겁다. 두 개의 추모비를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옆의 이세종 열사 추모비이고, 또 하나는 덕진공원의 김개남 장군 추모비이다. 이세종 열사는 1980년 5·18 광주항쟁의 최초 희생자이고 김개남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갑오농민혁명의 지도자이다. 이 두 개의 비는 모두 비극적 죽음을 증거하는 추모비이다.

이세종 열사는 1980년 5월18일 새벽 1시 전북대학교 교정으로 진입한 계엄군에 의해서 학생관 옥상으로 쫓기다 집단구타를 당하고 의문의 추락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김개남 장군은 갑오농민전쟁의 참담한 패전과 함께 1894년 12월13일 전주감영 마당에서 ‘횃불아래 반역의 부릅뜬 눈으로 목베여’ 육시를 당한다.

 

20111130_신영복.jpg 신영복 교수가 지난달 28일 전주 전북대 교정에서 5·18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 회원들과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늘 햇볕과 평화의 땅에서 추모비를 마주하는 마음이 당혹스럽다. 더구나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는 거기 새겨진 비문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 김성숙 선생은 학우였던 이세종의 마음이 되어 이 비문을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이세종 열사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너무나 푸른 가을하늘이 차라리 슬픔이었다.

오늘 추모비 앞에 모인 당시의 학우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30년이 지나 아픔이 한결 가셨을 법도 하지만 반가운 인사마저 서로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면할 수 없던 세월이었다. 국회의원, 시의원에서부터 교사와 일용직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걸어온 길이 한결같지 않지만 학창시절의 우정과 이상이 어떻게 굴절되고 부침하였는지 돌이켜보면 30년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든다. 추모비 근처 벤치에는 어린 학생들이 오후의 행복한 대화에 여념이 없고 우리도 이세종 열사가 추락한 표지판 옆에서 커피를 마신다.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 속에 묻혀 있는 수많은 사연들은 과연 우리의 생각에 어떤 강물로 흘러드는가? 유난히 화창한 가을 햇살이 오늘은 상처를 헤집는 아픔이 된다.

김개남 장군 추모비가 있는 덕진공원은 전북대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자연석 추모비는 이끼가 돋고 비바람에 바래어 글씨가 얼른 눈에 띄지도 않았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비문 역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 글귀는 당시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불려졌던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군사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라는 노래의 일절이다.

비문의 글씨도 식별이 어려울 정도였지만 사실은 그 글씨를 부탁한 사람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남규 시의원이 찾아온 기록이 그 전후사정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신택리지>의 저자인 향토문화연구회의 신정일 선생이었다. 물론 김남주 시인이 작고해서 연결고리가 끊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993년 5월 목동의 우리 집에서 커피까지 함께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얼마 전 그의 저서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양해를 구한다.

20111130_신영복_이세종추모비.jpg  

신 교수가 전북대 교정에 있는 5·18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 열사 추모비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그날 우리 집에서 이이화 선생께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인연이란 참으로 우연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일단 우리 집에서 나와 신정일 선생 일행은 전화를 걸기 위해서 근처의 파리공원에 들렀고 거기서 뜻밖에 김지하 시인을 만난다. 김개남 장군 비문을 받기 위해서 상경했다는 말을 듣고 김지하 시인은 동학혁명과 김개남 포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 장모님이 김개남 장군의 팬이어서 <토지>의 김개주가 바로 김개남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하소설 <토지>는 남루한 옷차림의 구천이가 평사리의 최 참판 댁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구천은 최치수의 어머니 윤씨 부인과 김개주 사이에 난 아들이었고 평사리에 흘러들었을 때는 괴멸한 김개주 부대의 패잔병이기도 했었다. 신정일 선생은 전주로 돌아오자마자 원주의 박경리 선생과 전화통화를 한다. 박경리 선생은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김개남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었고 그래서 <토지>에 그 양반을 썼다는 이야기, 김개남 장군은 세계적 혁명가이며 후배 작가들에게 작품화를 권고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광철 전 국회의원은 김개남 장군이 동학농민전쟁의 탁월한 지도자임에 틀림없지만 그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는 것을 지적했다. 승패의 분수령이 된 우금치 전투에 합류하지 않고 후방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봉준 장군이 우금치에서 수십 차례의 공방을 거듭하며 혈전을 치르고 있는 동안 김개남 장군은 전주에서 포병 8000명을 거느리고 금산·청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전력을 집중하지 못한 것이 참담한 패배로 이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전봉준과 김개남의 현실인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봉준이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반봉건투쟁을 일단 유보하고 항일 반제투쟁에 주력하는 이를테면 주요모순 우선노선임에 비하여, 김개남은 어디까지나 계급모순을 중심에 두는 기본모순 우선노선이다. 그래서 이름도 개남(開南)으로 바꾸어 남쪽에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뜻을 담았다. 남원부사를 비롯하여 순천부사, 고부군수 등을 차례로 처단하는 등 그의 비타협적 의지는 전봉준의 근왕주의적(勤王主義的)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 역시 부정적 평가의 근거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패전 이후 최후까지 끈질기게 항쟁의 맥을 이어간 부대가 바로 김개남 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비록 패배로 막을 내리긴 하였지만 갑오농민혁명은 그 후 의병전쟁, 3·1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그리고 광주항쟁과 6월 항쟁 등 역사의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논란과 쟁점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 좌우, 진보, 개혁, NL, PD, FTA 그리고 답보하고 있는 연대와 통합에 이르기까지 그 끈질긴 역사적 연루를 재확인하게 된다.

 

20111130_신영복_김개남추모비.jpg 신 교수와 김남규 전주시의원이 갑오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추모비에 담긴 뜻을 되새기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햇볕 속으로 걸어 나온 전주에서 오늘 10분 거리에 있는 두 개의 추모비와 100년 간격의 역사를 동시에 만나면서 다시 한번 삶과 역사의 엄청난 인연에 숙연해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강물의 표면에 투영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는 수많은 사연들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들 자신이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는 한 잎 낙엽이 된다.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란 인연이면서 우연이고 우연이면서 또한 필연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엮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그렇거든 하물며 역사의 인연이야 오죽 하랴. 거대한 산맥이 서로 밀고 당기듯 그 우람한 역사의 인연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오늘 하루 종일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햇볕과 아픔의 역설적인 인연이었다. 햇볕이 화창할수록 더욱 처연해지고 처연해질수록 햇볕은 더욱 화창하였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추락한 죽음과 횃불아래 육시당한 죽음은 처절하다. 그 처절함 때문에 더욱 빛나는 역사가 되는 것도 그렇다. 앙드레 말로는 “누가 프랑스 혁명을 실패라고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모든 민중투쟁은 장구한 역사적 맥락에서 언제나 승리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오늘 내내 지울 수 없는 생각은 비록 그것이 역사의 꽃이 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죽음은 거대한 상실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두고두고 통한의 아픔으로 메워야 할 거대한 함몰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실패에 대하여 누군가의 책임을 묻는 것이 쉽기는 하다. 그러나 누구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과연 추모비에 새겨진 글귀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이 되어 햇볕처럼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진다.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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