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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1-09-28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 (2)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신영복 | 성공회대 석좌교수
 
ㆍ새 세상 열려 한, 허균 남매 변혁정신은 지금도 유효

현판은 허난설헌 생가 터에 세워진 기념관 입구에 걸려 있다. 기념관은 자그마한 한옥이다. 많지 않은 관광객이 떠나고 난 뒤 나는 현판을 혼자서 대면해 본다. 허균·허난설헌 선양회 유선기 이사의 부탁으로 2006년에 쓴 것이다.

액자도 없이 평판에 죽각으로 새긴 소박한 현판은 마치 허균 남매의 모습인 듯 잔잔한 감회를 안겨준다. 유선기 이사와 임영민속연구회의 김석남 선생은 크지 않은 기념관을 못내 서운해하지만 나는 마당 가득히 고여 있는 초가을 햇볕 속을 걷는 동안 변방 특유의 한적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저만치서 안내자의 핸드마이크를 따르던 20여명의 관광객이 사라지고 나자 허난설헌 생가는 문득 빈집이 된다. 우리는 영정(影幀)에 분향한 다음 아예 허난설헌의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마치 시간여행으로 당시를 방문한 듯 감회가 심상치 않다.

유선기 이사는 이곳이 가장 낮은 곳이라고 했다. 대관령 동쪽이 영동이고 영동에서도 가장 낮은 곳이 바로 이 초당 지역이라는 것이다. 태풍 루사나 매미 때도 이쪽이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매화가 가장 빨리 피는 곳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매화가 가장 먼저 피는 곳? 한고(寒苦)를 겪고 청향을 발하는 매화, 그것도 변방의 창조성이라 할 수 있을까? 마당에는 백일홍 옛 등걸이 껍질을 벗고 있기도 하였다.

20110928_신영복_강릉.jpg  

임영민속연구회 김석남 선생과 신영복 교수, 허균·허난설헌 선양사업회 유선기 이사(왼쪽부터)가 27일 강릉 초당동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부근의 솔숲을 걸으며 두 인물의 생애가 우리 시대에 주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허난설헌은 조선에 태어난 것을 한(恨)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대화는 마치 그들과 함께하는 듯하였다.

신영복(이하 신) = 허균과 허난설헌, 우리 시대에도 계속 호출해야 하는 코드인가요?

김석남(이하 김) = 지금은 세월이 변했다고 하지만 인식구조와 문화유전자 이런 것이 아직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유선기(이하 유) = 서얼차별이라는 신분제도는 없어졌지만 지역차별, 양극화, 비정규직, 외국인노동자, 다문화가정 등 우리 사회가 현재 갖고 있는 여러 질곡들을 보면 허균이 당대에 가졌던 문제의식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허균 정신, 변혁 정신은 현재적 가치라 할 수 있지요.

신 = 허균·허난설헌 문화제가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김 = 조금 더 부연 설명하면 허균의 글 중에 호민론이 있습니다. 조선사회를 변혁시키는 주체를 민중으로 본 거예요. 민중이 호민이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허균의 호민론은 백성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눈다. 항민은 순종하며 부림을 당하는 백성, 원민은 윗사람의 수탈을 원망하지만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임에 비하여 호민은 허균이 찾는 이른바 변혁 주체라 할 수 있다. 사회 부조리를 꿰뚫고 때를 기다렸다가 백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사회 변혁을 영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가 쓴 소설 <홍길동>의 주인공이 바로 호민으로 캐스팅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 = 체제와 주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고 주체성과 저항성을 확보하고 있는 민중이 호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김 = 허균이 장성 지방으로 갔다가 그러한 실제 인물을 접했습니다.

유 = 허균 당시보다 100여년 전에 실제 인물로 홍길동이 있었다고 추정을 하고 있는 거죠.

김 = 허균이 42세에 그런 사실을 접했습니다. 홍길동이야말로 내가 찾던 이상적인 민중이구나. 호민이구나. 그래서 홍길동을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 해서 한글 소설로 쓰게 된 것 같습니다. 홍길동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호민이 많아야 합니다.

 

허균허난설헌기념관.jpg 신영복 교수가 2006년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건립을 앞두고 써준 현판이 입구에 걸려 있다. | 정지윤 기자

 
신 = 현재의 사회변혁운동 논리도 호민론의 맥락에 닿아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유 = 허균·허난설헌 두 분의 자유 정신이나 창조 정신, 개혁 정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 = 강릉에 와서 다시 확인하는 것이지만 도도한 주류 담론은 역시 율곡과 신사임당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죽헌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기도 하지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도 신사임당과 율곡임에 틀림없습니다. 율곡은 학자이면서도 정치인이었고, 신사임당은 훌륭한 자녀를 길러낸 뛰어난 학부모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른 오죽헌은 그 규모부터 대궐같이 성역화되어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유 = 화폐에도 두 분이 다 나옵니다. 5만원권과 5000원권에 모자가 나오니까요. 그러나 10여년 전 선양사업을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곳 기념관을 찾는 사람들도 늘고 사람들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앞으로는 허균·허난설헌 문화제를 인문학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려고 합니다.

나는 한국의 변방인 강원도, 다시 그곳의 변방인 초당동 기념관에서 허균·허난설헌의 추억이 안겨주는 감회에 젖는다. 스물일곱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한 난설헌 허초희,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허균의 생애는 역사의 비극이며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우리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고 또 여행의 계절이라고 한다. 내가 쓴 기념관 현판을 인연으로 만난 허균과 허난설헌은 마침 청명한 가을 날씨와 함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안겨준 ‘역사여행’이었고 ‘가을의 성찰’이었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이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자기에게 맞춘다는 의미가 세상을 인간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라면 글자 그대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처럼 우직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새롭게 바뀌어 왔다는 사실이다.

허균과 허난설헌은 분명 어리석은 사람이며 비극의 인물이다. 불의한 사회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려 했던 ‘시대와의 불화’가 비극의 진정한 원인이라 할 것이다. <광해군일기>가 기록하고 있는 패륜과 역모는 패배자가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오명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시대를 뛰어넘으려는 자유와 저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허균·허난설헌이 지금도 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불의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조를 통하여 끝까지 복권되지 않은 인물이 광해군과 허균이라고 한다. 정작 허균의 복권은 뒤늦게 선양회가 주도하는 씻김굿 그리고 문화제로 진행되고 있다. 선양회 사람들은 차라리 복권되지 않은 허균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행사 때마다 어김없이 내리는 비가 그렇듯이 추모와 선양의 의지를 그만큼 더 치열하게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나는 허균의 시비가 있는 애일당(愛日堂)으로 가는 길에 교문암(蛟門岩)을 찾았다. 교산(蛟山) 자락이 동해로 벋어나는 곳에 교문암이 있다. 교산과 교문암을 잇는 산자락이 해변도로에 의해 잘려 있고 백사장에는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잘린 머리가 파도에 철석이며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허균의 삶을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허균 시비가 있는 애일당은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랜 듯 그곳에 이르는 산길도 인적도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애일당 옛터에는 오후의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고여 있어 그 이름을 방불케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허균은 이 햇볕 속에서 태어나서, 나고, 자랐던 것이다. 애일(愛日). 그가 사랑한 것은 햇볕이었고 해방이었고 새로운 세상이었을 것이다. 허균의 아호 교산(蛟山)과 애일당은 어쩌면 허균의 일생을 미리 보여준 상징이 아니었을까. 애일당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에 나는 다시 한번 초입에 서 있는 ‘홍길동’을 바라보았다. 홍길동은 ‘산불조심’ 팻말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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