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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엮으며

 

우리가 진정 그리워하는 것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지만,  20년의 수형 생활 중 5년 가까이 독방에서 지내야만 했던 한 영혼의 상상력은 손상시킬 수 없었나 봅니다. 오히려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키워내는 시간으로 그 세월을 살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995년 봄, 학고재 화랑에서 서예전 ‘손잡고 더불어’가 성황리에 끝난 후 「신영복의 삶과 글씨」라는 기사를 작성했던 기자는 "20년의 고독을 이겨낸 나비의 찬란한 날갯짓"이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역사의 무게가 묵중하게 배어 있는 서화 작품들에서 역설적으로 나비가 봄 하늘을 날아오를 때의 밝고 찬란한 날갯짓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아마도 ‘우리의 삶이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이 그림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높이 나는 새가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많은 것을 비우듯이 뼛속까지 비워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내 맘 같지 않을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럴 때면 책상 위에 놓인 ‘신영복 서화 달력’으로 저절로 시선이 갑니다. 우선 그림을 눈에 담고 그 옆에 쓰인 글귀를 한 자, 한 자 마음속에 새기며 읽어갑니다. 다 읽고 나면 어느새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달력 속의 글과 그림은 항상 현재의 내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됩니다. 참으로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삶의 현장과 동떨어지지 않고 그곳에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고 있는 글과 그림이기에 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언제나 내 얘기를 다 들어주고 조용히 위로하면서도 마지막에는 나 자신을 성찰하게 만들어 줍니다. 독서란 먼저 텍스트를 읽고, 그 다음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는 독서삼독(讀書三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찰의 열매를 세상에 내놓게 하는 숨어 있는 힘마저 느끼게 됩니다.


  저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은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한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것을 그리워하는지, 어떤 생각을 나누고 싶은지 알 듯합니다. 보는 사람들이 그리워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 있는 것도 없지 않습니다. 저는 그림을 잘 그리지도 못하고 그리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정작 그리워하는 것이 없나 하는 쓸쓸한 생각을 가진 적이 없지 않았는데 저자의 그림을 보다가 문득 잠들어 있던 나의 그리움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에 실린 글과 그림들은 사상의 장(場)을 ‘문사철(文史哲)’에서 ‘시서화(詩書畵)’로 옮겨놓습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라는 저자의 술회처럼 이 책이 우리의 상상력을 키워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을 공유하는 작은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급변하는 환경과 쉽게 변화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바람이 되어 새날을 열고 꽃이 되어 이 땅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서화 에세이-처음처럼』는 더불어 숲이 되어 인간적인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나무들이 함께 엮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라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 책이 ‘언제나 처음처럼’ 새날을 시작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럿이 함께 글을 읽고, 동시대의 고민을 공유하고 나아가 인간적인 삶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든 「더불어숲」모임의 홈페이지(www.shinyoungbok.pe.kr)에 가면 저자가 지금까지 쓴 책 원고 서화작품을 모두 만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유하자는 것이 저희들의 생각입니다.  “홈페이지에 전시된 작품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라는 카피레프트 정신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영복 서화전’에는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에서 1년 반 동안 사형수로 죽음을 기다리던 청년 장교의 고뇌가 담긴 펜화에서부터 서예전 ‘손잡고 더불어’ 작품은 물론, 최근의 서화 작품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예전과 홈페이지 전시 후 많은 분들로부터 서화집으로 꼭 출간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저희 또한 같은 마음이기에 여러 차례 청했으나 이미 홈페이지에 있고 서화 달력의 형태로도 매년 나오고 있는 것을 다시 책으로 만든다는 것에 대해 내켜하지 않으셨습니다. 매번 사양하는 선생님을 어렵게 설득하여 나온 결과물이 바로 이 책,『서화 에세이 - 처음처럼』입니다. 기존의 작품만으로 엮는 것은 끝까지 불편해하셨기에 결국 6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새로 그린 후에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서화 에세이-처음처럼』의 작품도 빠른 시일 안에 홈페이지에 실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더불어 이 기회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서화 작품이 저희도 모르게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심지어 ‘더불어숲’이라는 붓글씨 작품 그대로 아무런 상의 없이 상표 등록까지 해놓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로 잡기는 했지만 이처럼 저희의 뜻에 반하는 상업적 사용이 계속된다면 함께 나누고자 하는 저희의 작은 노력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어떤 분들은 이러한 부작용을 염려해 홈페이지에서 복사 방지 조치를 취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러한 조치보다 사람을 믿고 싶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간의 약속이 있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홈페이지가 신뢰받을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사람들의 인정으로 채워지는 숲이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서화 에세이-처음처럼』의 기획과 편집을 위하여 오랫동안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랜덤하우스코리아의 편집진에 깊이 감사드리며, 이 책에 실린 글과 그림들이 걸어왔을 긴 역사에 갈채를 보냅니다.

 

 

「더불어숲」모임을 대신하여
이승혁·장지숙


  1. 여는 글 | 수많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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