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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수많은 ‘처음’

 

 

『서화 에세이 - 처음처럼』은 글과 글씨와 그림을 정성들여 편집한 책이어서 한편으로는 책을 만든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몇 가지 설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특히 그림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그동안 필자가 쓴 글들은 여러 권의 책으로 소개되었고 글씨 역시 서예전 출품작, 현판, 비문, 제호 등으로 자주 소개되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그림의 경우는 따로 내놓을 정도가 못되기도 하지만 거의 소개된 일이 없었습니다.

 

1993년 2월『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영인본 『엽서』가 출간되면서 처음으로 알려진 셈인데 집으로 보낸 엽서 아래쪽 구석에 작은 그림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작은 그림들은 옥중 서신의 어깨 너머 독자였던 어린 조카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엽서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밝게 만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5년 3월의 서예전에 출품된 작품 중에 그림이 들어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후 그림이 외부에 소개된 계기는 아마 일간신문에 연재되었던 기행문의 삽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 기행과 해외 기행문의 삽화를 필자가 손수 그리게 된 이유는 화가 한 사람이 동행하게 되면 그만큼 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순전히 비용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지만 필자로서는 자기 글에 넣는 삽화여서 부담이 적었을 뿐 아니라 특히 글에 채 담지 못한 것들을 삽화로 보충할 수 있어서 글 쓰는 부담이 조금은 줄었습니다. 그림이 언어의 경직된 논리를  부드럽게 해주기도 하였고 또 그림 그 자체가 여백이 되어 독자들 나름의 글 읽기를 돕기도 했던 셈입니다.


비난보다는 칭찬이 귀에 더 잘 들리는 법이지만 그 후 여러 사람들의 요구도 있어서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씨와 그림 그리고 서화 작품이 올려졌고 서화집의 형태로 아예 책으로 만들자는 제안도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필자가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은 이미 출간된 글들을 다시 싣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더구나 문장의 일부를 따로 떼어서 싣는다는 것도 무리라 생각되었습니다. 특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 글들은 좁은 엽서에 갇혀 있는 글이었을 뿐 아니라 당국의 검열과 그 위에 자기검열이라는 이중의 제약으로 지나치게 절삭(切削)된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문에 연재된 기행문 역시 갇힌 글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일간 신문의 지면이란 매우 한정되어 있는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공적 공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글들이란 나로서는 ‘다시 쓰고 싶은 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차마 쓰지 못하고 행간에 묻어둔 이야기가 더 많은 글이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아무리 부연하더라도 정의(情意)를 다 담을 수 없는 부족한 그릇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막상 글보다 더 망설여졌던 부분은 그림이었습니다. 비록 자기 글의 삽화였다고 하지만 글이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그림의 비중이 더 커지면서 그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옥중 서신의 아래쪽에 조용히 앉아 있거나 기행문의 도우미 같은 위치에서 갑자기 격상된 자리에 올라앉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흠결이 더욱 드러나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망설여 왔던 책이었습니다. 책을 내면서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이 책의 엮은이입니다. 엮은이 두 사람은 그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과 그림을 모으고 줄곧 관리해왔었고 어쩌면 이 책의 의미에 대하여 가장 객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만 따르기만 하면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만드는 동안 기획자와 엮은이가 거듭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였음은 물론입니다. 쉽게 접할 수 있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기동력이며, 오히려 독자를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이 책의 의미를 강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매우 미안한 책이며 선뜻 내키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물론 이번 책을 준비하는 동안에 글을 새로 쓰고 그림을 다시 그리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이미 있는 글과 그림을 모아서 편집한 것입니다. 독자들로서는 이미 알고 있는 글이고 그림일 수밖에 없습니다. 양해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흔히 여행에 비유하기도 합니다만 일생 동안에 가장 먼 여행은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성(cool head)과 감성(warm heart)의 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지식과 품성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서화 에세이-처음처럼』에 나란히 놓인 글과 그림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관념성과 경직성이 그림으로 하여 조금은 구체화되고 정감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더구나 절삭된 글 특유의 빈 곳을 그림이나 글씨가 조금이나마 채워줌으로써 그 긴 여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슴의 공감들이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인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발에 이르는 긴 여정의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발’은 삶의 현장이며, 땅이며, 숲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하는 여정이란 결국 개인으로서의 완성을 넘어 숲으로 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완성이 명목(名木)이나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아니라 수많은 나무가 함께 살아가는 ‘숲’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책은 ‘처음처럼’에서 시작하여 ‘석과불식(碩果不食)’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획 의도를 필자는 물론 많은 독자들도 공감하리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필자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일관된 주제가 있다면 아마 역경(逆境)을 견디는 자세에 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을 견디는 방법은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며,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처음’을 꾸준히 만들어내는 길밖에 없다고 할 것입니다.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省察)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목이 잎사귀를 떨고 자신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성찰의 자세가 바로 석과불식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과불식의 의미는 씨 과실을 먹지 않고 땅에 묻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이든 한 사회의 어려움이든 역경을 견디는 자세에 관한 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처음처럼’의 뜻과 ‘석과불식’의 의미가 다르지 않고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책의 모든 글들도 이러한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화 에세이 - 처음처럼』은 어쩌면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서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함께 확인하고, 위로하고, 그리하여 작은 약속을 이끌어내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실린 이야기와 그림들은 사실 많은 사람들의 앨범에도 꽂혀 있는 그림들입니다. 독자들은 각자 자신의 앨범을 열고 자신의 그림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그러한 공감의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숲으로 가는 긴 여정의 짧은 길동무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기획의 전 과정을 맡아서 고생하신 양선우 편집장과 편집팀 여러분, 그리고 이승혁·장지숙 두 분 엮은이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미산리 개인산방에서 얼음강 물소리 들으며
신 영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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