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론] 고(故) 신영복 교수 문상을 가서 떠오른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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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6-01-19
미디어 조선pub_우태영

고(故) 신영복 교수 문상을 가서 떠오른 생각들


글 |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

조선pub 2016-01-19


20160119.jpg

▲ 성공회대 강당에 차려진 고 신영복 석좌교수의 빈소. 생전의 강연모습이 동영상으로 나온다.


1월16일 저녁 때 별세한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문상을 갔다. 성공회대에 차려진 빈소 영전에 국화꽃 한송이를 올렸다. 부인과 아들이 문상객에게 인사를 했다. 신 선생이 20년 징역살이를 하고 출옥한 다음에 결혼해서 얻은 아들이 잘 자란 모습이 신 선생을 위해서는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신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9월이었다. 당시 주간조선에 인터뷰 기사를 쓸 목적이었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20년 간 징역살이를 하다 그해 8월 14일 가석방으로 풀려난 그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는 “20년간 공부하고 20년간 징역살이 했다”는 말을 했다. 8살부터 28살 때까지 20년간 학교다니며 공부하고 28살 때부터 48살까지는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징역을 20년 살았다. 그리고 48살에 세상에 나와서 그동안 감옥에서 썼던 글을 모아 책을 냈다.

 

당시 그는 무시무시한 사상범인 통혁당 무기수로만 알려졌다. 그를 인터뷰하기 전에 그의 대학시절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들은 신씨가 서울대 3대 천재로 통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기억했다. 또 축구 등 운동을 아주 잘했으며, 축제행사 등에 여장 한복을 하고 고전무용을 추었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잘했다는 기억도 되살려냈다. 한마디로 단아한 스타일의 만능천재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인생이 꺾였다며 안타까워 했다.

 

주간조선 1988년 9월18일자에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그 후 신 선생이 성공회대학에 출강하고, 서예가로서, 문필가로서 이름을 높이고, 결혼도 하여 이 사회의 정상인으로 뒤늦게 안착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참 잘됐다 하는 생각을 했다. 신 선생과는 오다가다 얼굴이 마주치면 반가워하거나, 간간히 안부나 전하는 정도였다. 워낙 바삐 사시는 분인지라 시간을 뺏기도 어려웠다.

 

10여년 전에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 선생은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직한 상태였고, 나는 20년을 다니던 회사에서 명예퇴직한 상태였다. 지인이 연락하니 반가워하며 연구실로 함께 놀러오라는 말씀이었다. 해서 연구실로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저녁에는 인근에 있는 삼겹살집으로 가서 소주 한 병에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신 선생은 소주는 딱 한 잔만 받아놓고 계셨고, 지인도 그 때 가슴수술을 하고 난 뒤여서 술은 거의 마시지 못했다.

 

워낙 오랜만에 만나 뵙는 자리인지라 비교적 편안하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 기억나는 게 신 선생은 그 때도 건강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무릎 관절이 약해져서 등산을 하더라도 산은 오르지 못하고 평지만 걸어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성공회대 정년퇴직 후에 쉬고 싶은데 학교 측에서 석좌교수를 맡아서 계속 강의하라고 해서 힘들다는 것이었다.

사실 성공회대는 신 선생을 교수로 임용하면서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신 선생이 책이나 글로 미디어에 많이 등장하는 데 그럴 때마다 성공회대라는 직장명이 따라 붙는다.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신문 잡지 책 등에 인쇄되어 나오거나, TV 라디오 전파를 탈 때마다 성공회대라는 명칭도 따라 나오니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하나 신 선생은 한 큰 신문사에서 북한을 여행하고 북한 여행기를 연재해 달라는 제의를 해왔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금강산 같은 북한 지역에 대한 여행이 가능한 시절이었다. 큰 신문사가 정권과 협조하면 금강산뿐 아니라 묘향산이나 개성 원산 등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문사 마케팅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 참 재미있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신 선생은 끝내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라는 것이 참으로 신 선생다운 것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자신은 좌익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을 살았다. 하지만 자생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시도했을뿐 결코 북한을 추종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일반인은 하지 못하는 북한여행을 하면 아무리 큰 전국지에 글을 쓰더라도 결국은 과거에 북한의 지령을 받았구나 하고 사람들이 또다시 의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북한여행기를 쓰면 뭐라고 쓸 수 있겠나, 자유롭게 쓸 수 있겠나...

듣고보니 그랬다. 신 선생이 유명해지긴 했지만 생활하는 데 이런저런 제약요소가 적지 않겠구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하면서 헤어졌다.

 

그 뒤 신 선생은 인사동에 인문학 강의를 하러 가끔 나오곤 하였다. 인사동 나들이를 자주한 것도 사연이 있다. 신영복 하면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은 첫째가 ‘처음처럼’이라는 소주 이름을 쓴 독특한 서체이고, 두 번째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으로 대표되는 고전강의이다. 둘 다 징역살이를 하면서 터득하게 된 것들이다. 한문서체는 감옥에서 배웠다. 수인들에게 서예를 가르친 당대의 서예가 정향 조동광(靜香 趙桐鑛) 선생, 만당 성주표(晩堂 成周杓) 선생으로부터 배웠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처음처럼’체는 신 선생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서체이다. 어머니가 쓴 편지의 한글에 착안했다. 옛날 사람들은 한글을 죽 이어서 썼는데 그도 이에 착안한 것. 이어서 쓰는 데 기원한 것이라 그는 ‘연대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어로 번역하면 솔리대리티(solidarity) 서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고전이 전공이 된 이유는 감옥에서 한학자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1920~2006) 을 사사한 덕이다. 이구영은 북한에서 대남 공작원으로 남파됐다가 1주일만에 붙잡혀 감옥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던 인물.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경남대 심지연 교수가 책으로 정리해 놓았다.

이구영은 충청도 괴산의 부잣집아들로 남한에서 결혼해 딸 둘을 두었는데, 북한에서 남파되기 전에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그는 종로에 한옥집을 한 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 교수보다 늦게 석방된 뒤 이 한옥집에서 한문 등을 강의했다. 신 교수도 여기에 가끔 강의하러 나오기도 하였다.


이구영은 종로의 한옥집을 핏덩이일 때 북한에 놓고 온 아들에게 상속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공민이 한국 사람의 재산을 상속받을 법적인 권리는 없다. 남한에 있는 딸 둘도 모두 반대했다. 딸들에게 북한 간첩의 자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한 아버지가 북한에 있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을 쉬이 참기는 어려웠으리라. 이구영은 신 교수에게 성공회대 같은 데로 재산을 넘기려 했지만 이도 잘 안됐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신 선생이 병환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인문학을 강의했지만 정식으로 박사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그가 과대평가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진보적인 정권들이 들어섰을 때에는 이런저런 관직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모두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좌파들의 시위나 집회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참으로 이를 악물고 글쓰기에만 매진하고 산 듯하다. 왜일까?


신 선생과 함께 시골을 다닌 사람들은 그가 항상 문간에서만 잤다고 전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는 잠을 못자고 문간앞에서 새우잠을 자더라는 것이다. 이 역시 감옥에서 몸에 밴 습관이라고 한다. 징역 20년을 살고 나온 서울대 만능천재...그는 간신히 얻은 일상을 소중하게 지켜내려 엄청난 인내와 절제를 발휘했던 비범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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