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론] 그가 떠난 자리에서 ‘편지’로 그리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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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6-02-01
미디어 시사IN_이상원

그가 떠난 자리에서 ‘편지’로 그리워하네

1월15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투옥돼 무기수로 복역하던 중에 그가 쓴 편지는 1988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묶였다. 특별했던 책 출간 과정을 짚으며 그의 삶을 돌아본다.


이상원 기자  | [437호] 승인 2016.02.01  


스물다섯 살 청년의 이야기다. 길에서 만난 10대 아이들과 우연히 친해졌다. 프로레슬링 이야기를 나누고 씨름을 하며 놀았다. 친구들이 늘면서 정식으로 모임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학교 이름을 따서 ‘청구회’라고 지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모여서 책을 읽고 마라톤을 했다. 3년 뒤 청년은 반정부 조직인 통일혁명당 지도부로 몰려 구속됐다. 중앙정보부는 청년의 행적 전부를 추궁했다. 소풍 모임인 청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청구회의 정체와 회원들의 명단을 대라”고 심문받았다. 담당 검사는 ‘청구회 노래’가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청년은 육군교도소에서 매일 두 장씩 준 휴지에 이런 이야기를 기록했다. ‘나와 이 꼬마들의 가난한 이야기는 내 갑작스러운 구속으로 말미암아 더욱 쓸쓸한 이야기로 잊혀지고 말 것인지…’라고 썼다. 그가 20년간 교도소에서 쓴 글들은 마흔일곱 살이 된 1988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하 <사색>)이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지난 1월15일 세상을 떠난 신영복 선생의 첫 번째 책이다.


책보다 먼저 신영복 선생의 ‘옥중 서한’을 세상에 알린 곳이 있다. 1988년 5월 창간한 천주교 주간지 <평화신문>이다. 김정남 편집국장(후에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을 지냈다)은 신영복 선생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우연히 보고 게재를 결정했다. <평화신문>은 1988년 7월10일부터 4회에 걸쳐 ‘통혁당 사건 무기수 신영복씨의 편지’를 연재했다. 100여 편이 넘는 신영복 선생의 엽서를 한 면 전체를 할애해 담았다. 처음 실린 글귀는 ‘수인(囚人)들은 늘 벽을 만납니다’였다. <사색>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도 함께 실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중략)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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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1월18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성공회대학교 대학성당에서 고 신영복 석좌교수 영결식이 엄수되었다.


신영복 선생의 편지는 반향이 컸다. 게재 후 <평화신문> 편집국으로 전화가 많이 왔다. “편지를 읽고 울었다” “온몸으로 쓴 글이라 심금에 와 닿는다”라는 반응이 많았다. 지면이 넘쳐 3회째 연재가 실리지 못하자 독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평화신문>은 당초 3회로 계획한 특집을 한 차례 더 실었다. 당시 <평화신문>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던 백무현씨는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평화신문>과 같은 날 창간한 <한겨레신문>에서 신영복 선생의 기획연재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나도 신문 제작 전 엽서들을 보고 전율했다”라고 밝혔다. 마지막 연재가 실린 지 일주일여 뒤, 신영복 선생은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수감된 지 20년20일 만이었다.


<사색> 단행본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나왔다. 초판을 펴낸 곳은 햇빛출판사이다. 이곳 윤일숙 대표의 남편은 오병철씨인데, 신영복 선생과 같은 통혁당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다. <평화신문>의 김정남 편집국장은 단행본 출간을 주도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편지마다 소제목을 단 것도 그였다. 김 전 수석은 서문에서 신영복 선생의 가석방에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라고 썼다. 1993년 <엽서-신영복의 옥중 사색> 출간 또한 ‘친구들’의 생각이었다. 대학 친구 이영윤씨는 <엽서> 서문에 ‘(친구들은) 양심과 고뇌를 나누어 받는 심정으로 그의 엽서를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그러다가 원본은 본인에게 돌려주고 영인본을 만들어 나누어 가지자고 의견이 모였다’라고 전했다. 1998년 돌베개 출판사는 <사색> 초판에 <엽서> 자료를 더해 <사색> 개정증보판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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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자료
신영복 석좌교수


<사색>에 실린 편지는 신영복 선생 자신을 위한 글이었다. 생전 마지막으로 펴낸 책인 <담론>에 보면, “징역살이는 하루하루가 충격의 연속이었고, 만나는 상념은 끝이 없었다. 그 상념들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까웠다. 유일하게 허용된 공간이 집으로 보내는 엽서였다.” 집으로 띄우는 편지는 한 달에 한 번 허용됐다. 신영복 선생은 한 달 내내 그달 쓸 글을 생각했다. 메모를 할 수 없었기에 머릿속에 적었다. 그는 “문장은 물론 교정까지 마치고 암기하여 썼다. 그때는 기억력도 좋았고 머릿속이 백지이기도 했다”라고 썼다. “그렇게 열심히 썼던 이유는 언젠가 그 상념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치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불러오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편지들의 어조가 차분했던 까닭


그러나 <사색>에 실린 편지는 한편으로 타인을 위한 글이기도 했다. <사색>의 어조가 ‘무기수’의 것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차분한 까닭이다. 선생의 편지를 처음 읽는 사람은 교도소 검열관이었다.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골랐다. ‘힘들다, 괴롭다’고 쓰지 않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교도소 당국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에게 나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최종 독자인 가족도 고려했다. <담론>에서 그는 “반듯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였다”라고 썼다. 엽서 귀퉁이에는 어린 조카들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옥살이를 오래 하면 폐인이 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신영복 선생은 도인이 됐다”라는 말이 있지만, 20년 넘게 선생과 일한 돌베개출판사 한철희 대표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신영복 선생님은 속세와 떨어진 ‘낙락장송’ 같은 분은 아니었다. 따뜻하고 다정했으며 유머도 갖추셨다. 단행본이 나온 뒤 출판사 직원 전체에게 밥을 사주시기도 했다.” 출판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최고의 필자’이기도 했다.


 “원고와 씨름할 필요가 없었다. 문장이나 내용을 거의 고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초고를 주셨다. 투병 중에도 밤새 원고를 고쳤다.” 무엇보다 신영복 선생은 소탈하고 융통성 있는 대화 상대였다. 함께 여행하던 중 편한 숙소와 비싼 식사를 사양하며 선생은 이렇게 농담을 했다고 한다. “내 생활 기준은 감옥에 맞춰져 있다 보니 밖에 있는 건 다 좋아 보여.”


신영복 선생은 ‘신영복체’라 불린 글씨로도 유명하다. 소설·영화·드라마에서 여러 차례 쓰였다. 소주 ‘처음처럼’의 포장 글씨도 신영복 선생이 쓴 것이다. ‘글씨 사용료’는 받지 않았다. 두산주류는 신영복 선생의 뜻을 존중해, 그가 명예교수로 있던 성공회대에 1억원을 기부했다. 2008년 개관한 대통령기록관 현판 글씨도 신영복 선생이 썼다. 그러나 2014년 대통령기록관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의 글씨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한다”라는 민원을 받고 현판을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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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출판사에서 나온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초판과 1998년 돌베개에서 나온 개정판(왼쪽).


파주에 있는 돌베개출판사 편집국 1층 카페에도 ‘서삼독(書三讀)’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글씨가 있다. 선생은 “독서는 삼독입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라고 적었다. 1월15일 타계 이후 신영복 선생의 책들은 연일 평소의 10배 이상 팔리고 있다. ‘벽’을 넘은 수인(囚人)의 사색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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