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는 피라미드 속에 있다고 할 만큼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상징입니다. 피라미드는 무덤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공간은 아닙니다. 육신을 떠난 영혼이 다시 세상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다리는 영혼 대신에 관광객들이 줄지어 찾아들고 있습니다.
나는 피라미드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이곳은 영혼과 미라가 만나는 공간이 아니라 이집트와 우리가 만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집트 유적을 찾아다니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만난 것은 람세스 2세 석상입니다. 카이로 시가의 한복판에서부터 카르나크 신전, 룩소르 신전, 아부심벨 신전 등, 가는 곳마다 거대한 람세스 2세 석상을 만나게 됩니다.
람세스 2세 석상은 '이집트의 루이14세'라는 그의 별명에 어울리지 않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있습니다. 람세스 2세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고대 이집트를 한없이 친근하게 만들어줍니다. 무덤과 신전이 이루어내고 있는 죽음과 영혼의 공간을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로 채워 놓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카이로 박물관의 유리관 속에 있는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보는 순간,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충격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었습니다. 우선 미라가 시신이기 때문에 오는 충격입니다. 뼈와 가죽으로만 남아 있는 미라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의 어떤 최후(最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람세스 2세의 미라는 노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충격은 바로 그의 자세였습니다. 왼손을 약간 들어올리고 무어라고 이야기를 꺼낼 듯한 자세였습니다. 석상으로 된 람세스 2세가 들려주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그는 하고 있었습니다.
이 복잡한 충격에서 벗어난 후에 밀려드는 감회는 '세월'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살았던 기원전 1,300년에서부터 오늘까지의 시간을 상상해보았습니다. 3,300년. 참으로 길고 긴 세월입니다. 3,00년 동안 그는 자신의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죽음과 함께 육신을 떠나 하늘을 여행하다가 정말 다시 돌아오는 것일까?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나는 영혼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수시로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집트 문명은 인류 문명의 원형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영혼의 불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윤회 사상이나 중국의 천명(天命)사상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믿음들이 이제는 빛 바랜 유적과 함께 부질없는 과거의 우매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영혼을 기다리는 미라처럼 허망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일 강에서 44년 동안 배를 저어온 사공은 나일 강 역시 이미 과거의 생명을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아스완 하이 댐이 용수를 비축해주고 전기를 만들어주고 있지만 나일강은 더 이상 살아서 꿈틀대는 강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강을 단지 강물로만 보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사실입니다.
사라진 것은 나일 강만이 아닙니다. 남아 있는 피라미드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리카 의 눈부신 태양을 찬란하게 반사하던 화강암 화장석마저 벗겨진 채 지금은 끊임없이 풍화되고 있는 거대한 돌무덤으로 남아 있습니다. 피라미드의 현실(玄室)을 향하여 줄지어 들어가고 있는 관광객들의 행렬도 이미 영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 이곳 저곳에 박물관으로 흩어져 역시 뭇 사람들의 관광 대상이 되고 있는 미라들의 운명도 그렇습니다. 영혼의 불멸과 영생에 대한 믿음은 이제 과거의 어리석은 생각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사라진 것은 영혼에 대한 믿음뿐만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문명 그 자체가 이미 본래의 모습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 로마, 이슬람, 프랑스, 영국의 지배를 차례로 겪는 동안 이집트 문명은 이미 혼혈을 거듭한 인종처럼, 바다로 들어간 나일 강처럼 자취가 없습니다. 지금은 참으로 모든 것이 변해버렸습니다. 그럴수록 나로서는 3,3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리고 있는 람세스 2세의 메마른 모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거대한 피라미드의 신비 공간에서 들려나와 박물관의 유리관 속에서 무언가 이야기하려는 듯한 람세스 2세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잠자는 나일 강물과 함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마음 쓸쓸해집니다.
이집트 문명은 그리스-로마 문명의 원형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중세 유럽을 뛰어넘어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르네상스의 모델이 그리스-로마가 아니라 사실은 이집트 문명이었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피카소의 선과 색과 면이 이집트를 베낀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이집트는 인류 문명의 탁월한 높이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나는 이집트의 신전과 무덤 속의 벽화를 보면서 아직도 우리는 이집트의 조형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지극히 간소화된 구도, 그리고 문자와 회화가 이루어내고 있는 전달의 완벽함은 그 이후의 모든 미학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혼 불멸에 대한 이집트인의 믿음도 우리들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수많은 미라를 보면 육신을 떠나간 영혼이란 돌아오지 않는 것이 분명하며 적어도 아직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개인의 모습을 보거나 우리가 경영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시대에도 '불멸'에 대한 믿음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는 권력과 부, 그리고 그것의 불멸에 대한 집착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나는 사람이 영생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나마 세상의 모습이 지금보다 나을 리가 없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람세스 2세의 미라가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쌓아 불멸과 영생을 도모하였듯이, 오늘 우리들 역시 저마다의 피라미드를 쌓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 쌓은 것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한없이 충실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을 뿐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그 허무함을 이야기해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우리가 쌓고 있는 것들 중의 얼마만큼이,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남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열중하고 있는 오늘의 영조물(營造物)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후세의 피라미드가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과연 피라미드만큼 육중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