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투영된 현재 부모님께
촌초(寸草) 같은 마음으로 삼춘(三春)의 햇살을 바라보고 있으면, 땅 속에, 나무에, 벽돌에, 지붕에, 전봇대에……. 눈닿는 곳마다 일제히 아우성치며 일어나는 5월의 약동이 번쩍이는 듯합니다. 이 5월의 빛과 싱싱함이 어머님의 심신에 담뿍 스미어 환후(患候)가 말끔히 쾌차하시길 빕니다. 그래서 오는 파일에는 현등(懸燈)도 하시고 대전에도 나들이하실 수 있게 되길 기원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점필재(晤畢齋)에 관한 사료를 정리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진경(進境)이 월등하시어 머지않아 또 한 권의 저서가 빛을 보게 되길 기대합니다. 꼭 아버님의 저술에 부치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저는 영남지방의 유학적 사변보다는 호남의 민요에 담긴 생활 정서가 우리의 전통에 있어서 훨씬 더 크고 원천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김유신의 공성(功成)보다는 계백의 비장함이, 시조나 별곡체(別曲體)의 고아함보다는 남도의 판소리와 육자배기의 민중적 체취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제땅의 끈질긴 저항이 오늘의 역사인식에 있어서 각별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싶습니다. 그래서 저의 관견(管見)으로는 점필재에 대한 연구의 범위를 그의 문하인 김일손(金馹孫),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의 사림파에까지 연장하여 훈구세력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성격을 선명히 하는 편이 오히려 점필재의 사적(史的) 의의를 보다 온당하게 규명하는 것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역사현상은 그것이 개인이든 사건이든, 하나의 단절된 객체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여러 가지의 계기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변용의 가능한 방향에 긍(亘)하는 총합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더욱이 '과거'란 완성되고 끝마쳐진 어떤 불변의 것이 아니며, 반대로 역사인식은 언제나 현재의 갈등과 관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에 투영된 현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계속 새롭게 씌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의 평론집을 읽었습니다. 연전에도 같은 저자의 {극한의 민족}(極限の民族)을 읽고 에스키모, 뉴기니, 베드윈의 생활 깊숙히 들어가서 철저한 르포 정신으로 파헤친 미개와 문명에 대한 그의 뛰어난 통찰에 적지 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의 글은 일본사회가 갖는 한계와 자유로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긴 합니다만, 그가 견지하고 있는 사물을 보는 관점의 일관됨은 쉽지 않은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떠한 종류의 '매스컴'이나 '미니컴'이라도, 그것은 어떤 층을 대표하는 기관지인 법이며, 문제는 그것이 기관지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대표하는가에 있다는 그의 간결하고 적확(的確)한 사회인식이라든가, 어느 사회의 진상을 직시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라는 소박한 민중의식은 뛰어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무성한 잎을 키우는 것처럼, 우리의 인식도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입각하고 있는 관점의 여하에 따라 그 높이가 결정되게 마련인가 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관점들의 전환, 복합, 환산에 의한 원근법'도 필요하게 되겠지만, 이것은 어느 경우이든 인식의 입장피구속성(立場被拘束性, standortgebundenheit)을 승인한 연후의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1983.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