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이 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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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흔적이 주는 의미
형수님께


세모의 사색이 대체로 저녁의 안온함과 더불어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는 이른바 유정(幽情)한 감회를 안겨주는 것임에 비하여, 새해의 그것은 정월달 싸늘한 추위인 듯 날카롭기가 칼끝 같습니다. 이 날선 겨울 새벽의 정신은 자신과 자신이 앞으로 겪어가야 할 일들을 냉철히 조망케 한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징역 살면서 먹은 나이를 나이에 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입소 때의 나이를 대는 고집은 기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미련인지는 모르나 이것은 징역살이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육중한 체험의 값어치를 심히 경시하기 쉬운 결정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老)가 원숙이, '소'(少)가 청신함이 되고 안되고는 그 연월(年月)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해마다 거리낌없이 가지를 뻗는 나무는 긴 가지 넓은 잎사귀를 키워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뻗다가 잘리고 뻗다가 잘리는 나무는 가지도 안으로 뻗고 가시도 안으로 세우는 '서슬 푸른 속이파리' 새하얀 꽃의 탱자나무 울타리가 됩니다.
탱자나무는 금빛 열매도 품 속에 감추어 가시에 찔린 소년을 울게 합니다. "길 가는 사람들은 마음씨 상냥했어요……." 소년을 위해서 걸음 멈추고 탱자나무 가슴을 열어주었습니다. 활엽수의 시원함과 탱자나무 울타리의 튼튼함을 아울러 가지려는 것은 아직도 욕심으로 인생을 보는 어린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얼음 시름 안 풀려도 강물은 흐르고, "동지 팥죽 안 먹어도 나이 한 살 더 먹네."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또 새로이 맞이할 때에는 세월의 흔적이 자기에게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먼저 묻고, 그것에 걸맞는 열매를 키워가야 하리라 믿습니다.

 

 

198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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