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성만정 충즉즉(秋聲滿庭 蟲卽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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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만정 충즉즉(秋聲滿庭 蟲卽卽)
아버님께


사흘 잇달아 찬비 내리더니 오늘 아침은 짙은 안개 자욱합니다. 썰렁한 한기에 절로 어깨가 좁아집니다.

 

초불지이색변 목조지이엽탈
草拂之而色變 木遭之而葉脫

 

추풍(秋風)에 풀잎은 색이 바래고 나무는 잎사귀를 떨군다.
마침 읽어본 구양수(歐陽修)의 추성부(秋聲賦) 일절이 몸에 스미는 한기와 함께 절실한 감개를 안겨줍니다.

 

내하비금석지질 욕여초목이쟁영
奈何非金石之質 欲與草木而爭榮
염수위지장적 역하한호추성
念誰爲之戕賊 菴賊 亦何恨乎秋聲

 

금석(金石)이 아닌 인간으로서 어찌 초목과 그 번영을 다툴 수 있으랴.
생명이 이울어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거늘 어찌 추풍을 원망하리오.
가을에는 여늬 사람도 저마다 철학인이 되어 생활의 내부를 응시합니다. 대답 없이 머리 드리우고 잠든 동자(童子)가 어쩌면 훨씬 건강한 철학을 깨치고 있는 듯합니다.
보내주신 하서와 화선지 잘 받았습니다.
글씨는 갈수록 어려워 고인(古人)들이 도(道)자에 담은 뜻이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길'이란 그 '향'하는 바가 먼저 있고 나서 다시 무수한 발걸음이 다지고 다져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붓끝처럼 스스로를 간추리게 하는 송연하리만큼 엄정한 마음가짐이 아니고서 감히 무엇을 이루려 하는 것은 한마디로 '탐욕'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타협과 유행, 모방과 영합이 흔천해진 시류 속에서 어느덧 적당하게 되어버린 저희들의 사고 속에서 조상들의 대쪽 같던 정신을 발견해내기란 영영 불가능하지나 않을는지…….
잠든 동자를 깨워 더불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님을 비롯하여 가내 평안을 빕니다.

 

 

1979.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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