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榮福 한글 書藝의 社會性 硏究
원광대학교 서예문화학과 김성장 석사학위논문(2008)
I. 서론
신영복(1941~ )의 書藝는 동양 고전의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탄탄한 이론적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과, 사회 운동의 이념을 서예 형식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文字香書卷氣를 기본으로 삼던 서예 전통의 복원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書藝術에서 간과되었던 사회변혁의 감수성을 서예의 기법으로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法古創新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신영복의 독특한 한글 서예는 책의 제호, 비문, 현판, 서화 달력, 상품 로고, 상업적 목적의 간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생활에 파급되고 있으며 일부는 관공서와 공공의 장소에서 대중들과 친숙해져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글씨를 배우려는 자발적 모임이 지속되고 있고 그 결과들이 전시된 바 있다. 書論의 부재 속에 난립하는 공모전과, 대중과의 단절이 심화되어가고 있는 서단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신영복의 서예 활동은 해방 이후 한국 서예사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김은숙은 「신영복의 삶과 서예관에 관한 연구」1)에서 신영복의 삶을 꼼꼼히 살피고 그의 서예관이 형성된 과정을 분석하였다. 그러나 신영복이 살아온 시대의 저항 정신과 민중적 감수성이 어떤 관련이 있으며 서예 형식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분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논문은 신영복의 서예 중 한글 서예의 내용과 형식 미학에 대해서 분석하고자 한다.
2장에서는 관계론을 중심으로 한 예술론과 서예론을 살펴보고 신영복 한글 서예가 탄생한 배경과 신영복의 학서 과정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신영복 서예의 중요한 목적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고 보고 그가 추구하는 사상의 경향을 분석한다. 아울러 서예 기법을 기필과 운필의 특징, 장법 결구 등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그의 사회변혁적 감수성이 어떻게 서예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는가를 살핀다. 4장에서는 신영복 한글 서예가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현상과 그의 한글 민체의 탄생 배경이 된 사회 역사적 상황을 검토하고 시대 정신과의 상관성을 분석하고자한다. 이와 함께 서단과 세간의 평가를 다루고자한다. 기존 연구가 부족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인터뷰를 통한 평가를 첨가하였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신영복이 서예 역사상 기존에 없던 민중적 정서를 표현했으며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한 흐름인 민주주의 또는 ‘저항의 시대정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활동이나 서예 활동이 현재 진행형이라서 그 성과를 총체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은 본 연구의 한계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신영복에 대한 연구가 일천하다는 것 또한 본 연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 이러한 한계는 신영복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의 축적과 함께 앞으로 극복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본 연구는 신영복의 서예 활동이 시사하는 사회적 含意를 밝히고 그가 성취한 예술과 시대정신의 통일에 대해 가치 있는 의미부여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II. 예술론과 한글 서예의 형성과정
1. 예술론
신영복의 서예2)를 알기 위해 그의 예술론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예술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이는 그의 예술론의 바탕이 된 사상이 그의 삶과 시대 상황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의 사상의 핵심은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3)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럽 근대사가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를 관계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론이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 존재하며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원리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당면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 과정에 나온 그의 결론이다. 신영복을 삶을 이야기할 때 혁명가로서의 삶을 중시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혁명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감옥에 갔고 20년을 복역하였다. 체포되었을 때 그는 군인이자 육군사관학교 교수였다. 그의 체포 이유는 반국가단체 구성4)이었다. 신영복이 사회주의 노선의 통일혁명당의 조직원이었다는 것은 그가 가진 당시의 사상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쓴 석사 논문5)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바탕으로 사회를 분석하였다. 독재 권력에 대한 반대 운동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체제를 바꾸고자하는 혁명운동6)이었던 것이다. 사형 언도의 극단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가 무기수를 거쳐 감형과 출감에 이르는 그 과정이 혁명가로서의 삶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신영복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바로 이 혁명 운동 과정의 산물이다.
둘째, 학자로서의 삶이 있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투옥 전에 그는 경제학자로서 대학 강단에 섰고, 출옥 후 성공회대학교에서 역시 경제학 교수로 18년을 재직하였다. 성공회 대학에 있는 동안 그는 경제학과 한국 사상사를 강의하는 한편, 자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공부한 동양 고전의 지식을 바탕으로 동양 철학을 강의하였으며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강의'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詩經', '周易'등 중국 고대의 문헌과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論語'와 '孟子'를 비롯한 동양의 고전을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성찰하는 입장에서 해석학적으로 분석하였다. 이런 경우 그는 한학자7)이자 사상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저술 활동은 전공분야라는 틀에 매여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축적과 실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대의 특성과 역사적 과제를 문명사적으로 정리해내고 있는 인문학자이자, 시대의 지성8)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그 학문적 온축을 유려하고 詩적인 문장으로 표현해내는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하다.
셋째, 혁명가와 학자라는 이 두 축에 예술가의 모습 즉, 書道人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분리되어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한 가지를 전문적으로 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에게 혁명과 학문과 예술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어야 하고 하나였기 때문이다.9)
이러한 삶과 사상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신영복 예술론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의 예술론은 첫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기본적인 관점이 나타나 있다. 그가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에 간단한 그림과 붓글씨를 곁들이는 예가 종종 있었는데 이것 자체가 그대로 예술론이다. 편지 글의 내용을 통하여 예술과 서예에 대한 생각을 풀어 놓기도 하였다. 이후 그의 예술론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제시되었다. 그의 저서와 인터뷰 등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예술론의 주요 특성 그리고 시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영복이 예술을 인간 수양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영복 예술론의 전제로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기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자획의 모양보다는 자구(字句)에 담긴 뜻이 좋아야 함은 물론, 특히 그 사람이 훌륭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작품과 인간이 강하게 연대되고 있는 서도(書道)가, 단지 작품만으로 평가되는 인간 부재의 다른 분야보다 마음에 듭니다.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하여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 인간의 품성을 높이는 데 복무하는 예술과 예술적 가치로 전환되는 인간의 품성과의 통일이, 이 통일이 서도에만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근묵자(近墨者)의 자위이겠습니까.10)
이 글은 書에 대한 인간적 관점이 배어있는 의견이라 할 수 있는데, 신영복이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書藝보다 書道라는 말을 선택하여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11) 단지 작품만으로 평가되는 극단적 경향을 예술 지상주의라고 할 때, 바로 書에서 藝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문제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글씨란 타고나는 것이라는 세간의 믿음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발언에서 확인되듯이 신영복에게 예술이란 오히려 巧를 벗어난 것이어야 하며 혼신의 힘과 정성으로 빚은 단련의 미12)가 더 소중한 것이라고 본다.
인간과 예술의 통일, 예술의 體化, 이것이 신영복 예술관의 핵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씨를 글씨로만 쓰는 것은 寫字官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상품화된 書藝란 아예 書道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人格과 學問의 온축이 그 바닥에 깔리지 않는 글씨는 글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스승의 인격과 서예관이 신영복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13) 추사가 말한 문자향서권기의 예술관이 그 제자들의 맥을 타고 신영복에게까지 이르렀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14) 이와 같은 신영복의 예술관은 전통적으로 동양의 예술관에 맥이 닿아 있다고 하겠다. 동양에서 예술은 인간이 가야할 바른 길에 동반하는 부차적 개념으로 기능해왔다. 朱子의 眞善美 개념에서도 ‘진정한 정감으로부터 나온 작품은 좋은 작품이고, 거짓된 감정으로부터 나온 인위적으로 조작된 작품은 결코 좋지 않은 것’이며, ‘문학과 예술이 인간 심성에 미치는 영향과 수양의 도구로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윤리적 美’라 할 수 있다. ‘문학과 예술 창작에 전념하는 것, 특히 글을 수식하는 것을 ‘文’의 방법으로 삼는 것에 동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극히 혐오’15)했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공자가 말한 ‘仁의 具現態로서의 예술’16) 또한 같은 맥락이다. 신영복은 그의 스승이 서예가라는 말을 싫어한 사실을 상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阮堂·圓嶠만 보더라도 서예가이기 이전에 모두가 먼저 뛰어난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退溪 李滉, 栗谷 李珥, 尤庵 宋時烈, 孤山 黃耆老 등 우리나라의 명필은 어김없이 학자이고 처사였다…서예는 예부터 6예의 하나로 기본적으로 '인간학'이라는 것이었다.17)
신영복이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이 인간중심적 관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다음으로 신영복의 저서와 인터뷰를 통해 발견되는 중요한 특징은 그가 인간중심 예술관의 연장선상에서 예술의 사회적 메시지를 펼쳐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신영복은 서예를 사회적 발언의 매개체로 본다. ‘수단으로서의 예술관’이라 할 수 있다. 인격과 예술 활동을 등가로 보는 그의 예술관에 이미 암시되어 있듯이 그의 예술론은 예술 행위를 하는 주체, 즉 예술가가 발 딛고 서 있는 사회적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중시한다. 예술가는 사회적 역할을 해야하며 따라서 예술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산물이거나 그 시대정신의 첨단의 자리에 서 있어야한다. 예술은 고매한 취미가 아니며, 과시욕이 될 수도 없고, 우아한 사치일 수는 더욱 없다. 더구나 지식인이 사회적 과제를 붙안고 고민하는 자리에서 당대의 첨단 메시지를 담아내지 못하면 진정한 예술은 탄생할 수 없다. 예술을 통하여 사회현실을 개조할 수 있고 개조해야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그의 예술관은 그의 글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는 만리장성을 보며 감탄하지만 ‘그 많은 벽돌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사람들의 노역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희생된 약자들, 소수의 강한 권력에 무참히 당해야만 했던 다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신영복은 ‘영남 지방의 유학적 사변보다는 호남의 민요에 담긴 생활 정서’를, ‘김유신의 攻成보다는 계백의 비장함’을, ‘시조나 별곡체의 고아함보다는 남도의 판소리와 육자배기의 민중적 체취’를, 그리고 ‘백제 땅의 끈질긴 저항의 역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18)
셋째, 마지막으로 실용적 예술관을 들 수 있다. 이는 고급한 예술 작품을 실생활에 쓰이게 한다는 의미의 실용적 예술관이 아니고 생활 속의 예술을 의미한다. 일상 삶의 예술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美) 자는 ‘양’(羊) ‘대’(大)의 회의(會意)로서 양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큼직한 양을 보고 느낀 감정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 고기를 먹고 그 털을 입는 양은 당시의 물질적 생활의 기본이었으며 양이 커서 생활이 풍족해질 때의 그 푼푼한 마음이 곧 미였고 아름다움이었다. 이처럼 미는 생활의 표현이며 구체적 현실의 정서적 정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바깥에서 미를 찾을 수 없다.19)
아름다움이 물질적 생활의 기본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 이것이 신영복의 실용적 미학관이자 예술관이다. 어느 목공의 鬼才가 나무로 새를 깎아 하늘에 날렸는데 사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그에게는 ‘우리의 생활에 보태는 도움에 있어서는 수레의 바퀴를 짜는 한 평범한 목수를 따르지 못한다’는 비판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글씨도 마찬가지여서 ‘一’ 자에서 강물소리가 들리고 ‘風’ 자에 바람이 인다 한들, 그것이 무엇을 위한 소용인가’20)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쓰임, 또는 삶의 보탬이라는 관점에서 그는 이른바 완상으로서의 예술, 美를 탐하는 예술 중심주의적 사고에 우호적이지 않다.
2. 한글 서예의 형성과정
신영복 한글 서예의 가장 큰 특징은 우선 옥중 서체라는 점이다. 신영복 한글 서예의 탄생은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영복의 학서 과정이 일반적인 서예 학습자들의 학서 과정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어린 시절부터 조부로부터 붓글씨 가르침을 받았으나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공부는 감옥에 있는 동안 만당 성주표와 정향 조병호에게서 받은 사사이다. 일차적으로는 죄수 신분인 신영복이 교도소의 초빙으로 봉사활동을 하러온 성주표․조병호 두 분과 사제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주는 시사점이다. 이 풍경은 사제 관계의 색다른 아우라가 있다. 거기에는 보통의 사사 관계가 만들어낼 수 없는 독특한 상황 논리와 긴장이 있다. 감옥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주는 사회적 단절감과 고립, 복잡다단한 인간관계가 제거된 공간의 여백이 있다.
현대의 감옥이 왕조 시대의 유배와 형식을 달리하긴 하지만 그것은 형벌의 일종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사회적 활동의 제약이라는 점에서 내용적으로는 유사하다. 조선 시대 문학의 경우 ‘流配文學’21)이라는 용어가 따로 있을 만큼 유배지에서의 삶이 한 작가에게 주는 독특한 조건과 영향관계가 있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달에 한번 보내는 엽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22) 삶을 20년간 살았다. 그중 5년간은 감옥 중의 감옥이라는 독방의 세월이었다. 유홍준(1949~)이 신영복의 글씨를 논하면서 ‘조선 시대 서예의 대가 중에서 원교 이광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이 모두 귀양살이에서 그 위대한 서체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원교는 신지도에서 25년간,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추사는 제주도에서 9년간 유배 살면서 그 사상과 글씨를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 “유배체”의 書家였음을 말한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추사, 다산, 원교 등 ‘많은 작가들이 정작 유배지에서 예술과 학문이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면 필시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나 운명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다’는 이동국의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아울러 신영복의 ‘온 종일 글씨를 썼던 기간도 7, 8년은 되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이동국은 ‘오히려 감옥이 아니었더라면 쇠귀체도 없었다는 확신이 간다’고 단언한다. ‘極工의 시간은 복잡다단한 일들이 무작위로 벌어지는 일상에서 갖기란 오히려 더 어려운 법이기 때문’23)이라는 것이다.
그와 스승이 일반 서예계의 도제적 사제관계가 아닌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재소자들에 대한 서예 지도의 권유를 받고 감옥에 왔던 조병호가, 조선 시대의 유배 신분과 비슷한 사상범들이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24)에서 알 수 있듯이 신영복과 조병호는 특별한 사제 관계였다. 조병호 자신이 일제하에서 은둔의 길25)을 걸었던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조병호는 일제하의 선전에 작품을 냈다가 지인들의 지탄을 받고 이후 서예계와 인연을 끊은 것26)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 권력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길항하는 한 인간이 현실 권력의 유혹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 욕망의 끈을 놓고 재야의 서예가로 살아가던 사람이, 현실의 체제 자체를 바꾸겠다는 혁명 운동을 하던 사상범 신영복을 감옥에서 만났을 때 그 유다른 감회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4년여 기간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주 교도소를 방문하였으며 재소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당신이 소장하고 계신 명필들의 진적을 일일이 짚어가며 일러주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봉사활동 차원 이상의 진한 유대감을 감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신영복이 기존 서예계에 아무런 위상도 갖지 않고, 서예계와 어떤 관련을 맺지 않고 있는 상황 또한 조병호의 개인적 삶의 노정과 관련해서 유의해 봐야 할 것이다. 신영복은 공모전을 통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서예계 내의 인맥이나 학맥을 갖지 않은 채 감옥에서 고립된 학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도제식 師事에 의해 수련과 공모 과정을 거친후 작가로서의 위치가 결정되고 서예가로서의 활동이 시작되는 풍토에서 보자면 그의 경력은 이례적이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만난 스승들에게 배운 것은 한문서예였다. 그는 한글 서예를 특정 스승에게 배우지 않았고, 조병호에게서 한문을 배우면서 한편으로 혼자서 한글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궁체는 이철경의 한글 궁체를, 고체 중에는 훈민정음 판본체를 썼으며 나중에 복사된 언간본을 보았다고 회고한다.27) 스승에게 직접 지도를 받는 것과는 달리 혼자서 공부하였다는 것은 그의 한글 서예에서 자유롭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있는 전제라 할 수 있다. 책의 글씨를 보고 혼자 쓰면서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쓴 글씨의 오류를 스스로 수정해 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에는 스승에게서 체본을 받아 연습하고 제자의 글씨에 대해 스승이 직접 가필을 하거나 오류를 수정하는 등의 훈육 체험이 없다. 물론 한문 서예의 사사를 통하여 그러한 과정을 이행해가는 중이었지만 한글을 쓰는 스승이 체본을 해주는 과정에서 몸의 자세, 운필, 붓을 흐름을 눈으로 익히는 것과는 다른 조건이다. 따라서 스스로 오류를 수정해야하는 약점과 함께 자신이 학서 과정의 주체가 되는 이점이 있었다. 예술 행위의 궁극적 목표 가운데 하나가 자유로움이겠으나 출발 단계에서의 자유로움은 자칫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자유로움은 긍정적 창조의 길로 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지만 방향 없는 오만이나 방일로 흐를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글 서예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궁체에 대하여 어느 정도 깊이 있는 공부를 하였는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는 이 반론의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미 정리하고 있었다. ‘서예의 정신은 한글이나 한문이 다를 바 없다’며 그는 ‘서도의 정통은 어디까지나 서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예의 ‘집필, 묵법, 용필, 필세 등 그 법이 넓고 깊은 것’이지만 서예의 정통을 잇는다고 하는 것은 ‘한자이든 한글이든 결국 필법으로 요약’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서예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할 때의 계승의 대상을 ‘中鋒, 管直, 藏鋒, 懸腕, 懸臂 등 用筆의 요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정통의 핵심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학의 계승이라고 보았다.
정통성의 또 하나의 문제는 법첩의 임서와 같이 과거의 명필들이 도달한 미학의 계승문제이다. 명필들의 글씨에서 그 필법·사상·인격 그리고 미학을 읽을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사상과 미학을 통하여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 그리고 시대미학을 읽을 수 있다.28)
법첩 임서의 기본 수련을 전제로 미학의 계승이 정통을 잇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서예란 그것을 글씨로써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과제와 정서로 지양해내는 작업이어야 하며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나의 것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는 게 신영복의 결론이다. 정통의 핵심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학의 계승’이고 그가 우리 시대의 민중 미학과 저항 미학을 담을 수 있는 형식을 찾게 되는데 신영복은 이를 母筆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붓글씨를 쓰신 것으로 확인된다.29) 수인의 삶을 사는 옥중의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어머니의 간절함과 그 편지를 읽는 아들의 서정이 만나는 지점, 이것이 신영복 민체의 탄생을 가능케 한 중요한 지점이다.
신영복은 궁체가 이룩한 형식 미학의 특성을 분석하고 궁체의 미학에 어울리는 내용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궁체로 시조나 별곡, 성경 구절을 쓰면 어색하지 않은데 그렇지 않은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궁체의 형식에 담았을 때 어색하게 느낀 것은 ‘민요-저항시-민중시’ 등이었다. 그에게 궁체는 ‘유리 그릇’이었고 ‘민요-저항시-민중시’는 ‘된장’이었다. 된장이라는 ‘내용’과 유리 그릇이라는 ‘형식’이 자아내는 부조화를 확인하는 이 순간이 바로 신영복이 새로운 한글 서체를 탐색하는 출발 지점이다. 된장인 ‘민요-저항시-민중시’를 궁체라는 유리 그릇이 아니라 아닌 뚝배기30)에 담아야한다는 발상의 전환점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영복은 왜 궁체가 유리그릇이라고 느꼈던 것일까. 궁체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상궁들에 의해 형성된 글씨31)이다. 왕후들의 수렴청정 시에 나라의 정사에 관한 공문서를 궁녀들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며 조선 사회의 국가 권력 수뇌부가 머무는 궁중의 수직적 질서 속에서 위로의 공경과 겸손, 아래로의 위엄과 정숙함을 간직한 사람들이 형성해 낸 글씨이다. 궁체 형성의 시대 상황과 신분적 조건에서 보듯 궁체는 귀족적 특성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공간의 한계, 신분적 제약 속에서 특수 계층에 의해서 형성된 서체이다.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정한 한계성을 띠고 있는데, 사용주체나 목적에 부합되는 定形性이 과도하게 추구되어 자유스러움이 결핍’32)되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그러한 제약에 이미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영복은 궁체가 이 시대의 시대 미학을 담아 내는 서체가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나아가 지금, 여기서, 나 자신이 글씨를 쓰는 서사자로서 자신의 당대성을 실현하는 서체를 모색했다. 귀족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서민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서정과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어떻게 서예의 형식 미학 속에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즈음의 한글 서도(書道)는 대체로 궁중에서 쓰던 소위 궁체를 본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저는 궁정인(宮庭人)들의 고아(高級)한 아취(雅趣)보다는, 천자문(千字文)의 절반인 “지게호(戶)” “봉할 봉(封)”까지만 외우시는 어머니께서 목청 가다듬고 두루마리 祭文을 읽으실 때, 옆에 둘러 앉아서 공감(共感)하시던 숙모님들, 먼 친척 아주머니들처럼 순박한 농부와 누항(陋巷)의 체취(體臭)가 배인.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습니다.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나도 쓰면 쓰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수수한 글씨를 쓰고 싶습니다.33)
어머니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누항의 체취가 담긴 글씨를 쓰고 싶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신영복은 어머니의 글씨와 ‘어릴 적에 춘향전 필사본 등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두루마리 글씨를 생각하면서…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34) 서체를 시도하게 된다. 어머니가 춘향전 등의 필사본 책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신영복이 기억해내고 자신의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가는 참고자료로 삼았다는 점은 신영복 한글 서예 탄생의 종적 흐름에서 볼 때 빼 놓을 수 없는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영복의 기억에 찍힌 필사본의 인상은 결국은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삶과 문화의 그림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영복 한글 서예 형성에 개입하게 되는 사실들, 말하자면 조선 후기 서민들이 남긴 필사본 글씨와 어머니의 모필 서한이 신영복에 이르는 사적 경험의 영역과, 공적 공간에서 설정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흐름으로 추사 김정희의 맥이 오세창․민형식 등을 거쳐 성주표․조병호에 이르고 그것이 교도소에 있는 신영복에게 이어지는 縱線이 겹쳐진다고 하겠다. 그것은 한글을 갈망하던 서민들의 하층 문화와 한문 중심의 사대부 문화가 병존해오는 양상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두개의 지류가 통시적 흐름이고 60년대로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격동의 현대사가 그 두 지류를 만나게 하는 공시적 배경이 된다 하겠다. 신영복 한글 서예의 형성에 개인과 가족, 가족과 사회,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 문화에 남아있는 그 시대의 흔적들은 물론이고 상층 문화의 축을 이루던 한문 서예의 문화가 복잡하게 錯綜하고 있다.
III. 작품의 내용과 기법
1. 작품의 내용
신영복은 서예 작품 속에 이 시대와 사회를 향하여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자한다. 메시지는 주장이나 설득 또는 사회적 발언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회단체들의 후원행사가 있을 때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며 글씨도 글씨지만 문구가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기억이 난다’35)고 하는 경우, 이는 작품의 내용에서 메시지를 중시하는 신영복 서예의 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모든 예술 행위가 작가와 사회의 소통 수단이라는 것은 보편적 사실이지만 작품의 글 내용에서 신영복은 특히 메시지가 1차적 목적이고 서예는 그 메시지를 담는 수단이자 형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서예가 다른 사람에게 또는 사회적으로 자기의 어떤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매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관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문화를 서예의 미학적 구조를 통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영복은 다른 서예가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으로서 메시지를 다루었다. 신영복은 ‘민요-저항시-민중시’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형식의 한글 서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구체화하였다. 저항과 민중의 개념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현대사의 사회적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다. 신영복이 첫 전시에서, 또는 그 이후에 작품화한 글의 내용과 그 글의 작자들에 대해 살펴보자.
신영복이 첫 전시에서 보여준 한글 서예의 내용을 쓴 원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박노해 -「손무덤」,「눈물의 김밥」<圖3>
신경림 -「새재」
신동엽 -「금강」
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圖4>
김지하 -「황토길」
박노해의 시 「손무덤」은 프레스 작업 중 손이 잘려나간 노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80년대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노동 조건을 배경으로 노동자의 삶과 소박한 꿈이 얼마나 비참하게 짓밟히는지를 그리고 있다. 「눈물의 김밥」은 국가안전기획부 지하 밀실의 고문 현장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박노해의 체포와 투옥의 체험이 반영된 이 작품은 군사 정부 아래에서의 끔찍한 인권 말살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경림은 ‘민중 현실을 리얼리즘적 객관성과 풍부한 서정으로 형상화’36)한 시인으로 평가 받으며 ‘한국 현대 시사에서 서정시의 창작을 방법적으로 혁신하고, 서사시의 창착 실천을 통해 방법적으로 확장시켰으며, 정치경제적 현실의 문제를 시에 반영하는데 다양한 방법적 확대를 시도’한 시인이다.37) 신영복이 첫 전시에서 쓴 가장 긴 글이 신경림의 「새재」였다. 10폭짜리 병풍 대작이다. 그는 2만자가 넘는 이 장편시를 오류와 수정 없이 한 번에 완성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신동엽은 ‘현대 사회의 삶과 문명에 대한 비판과 민족의 모순된 역사에 대한 비판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인간의 원초적 생명과 자연 그리고 민족의 순수성에 대한 동경’38)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특히 신영복이 작품화한 장편 서사시 '금강'은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민족사의 유장한 힘을 보여주는 최고의 민족 서사시39)라 할 만하다. 또 첫 도록의 작품 가운데 거친 붓맛으로 작품화한 ‘흙내’의 ‘모든 쇠붙이는 가라 향기로운 흙 가슴만 남고’라는 글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이다.40)
리영희는 70~80년대 대표적 언론인으로서 ‘냉전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존재 기반으로 한 독재 권력의 해체’41)를 위해 실천적 삶을 산 지식인이다. ‘1960-80년대에 광신적인 극우,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와 군사 독재 지배가 천지를 진동하며 한국의 하늘을 암울하게 뒤덮을 때 한국의 민주화와 대학생들의 의식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42) 리영희는 독재 권력에 탄압을 받으며 해직과 투옥을 거듭하는 삶을 살았다. 신영복이 작품화한 리영희의 글「새는 좌우로 난다」는 한국 사회의 사상적 우편향 현상을 비판하며 균형적 사고를 촉구한 글이다.
김지하는 ‘권위주의적인 비민주적인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에 맞선 민주화 투쟁과 그에 따른 인신 구속 등을 겪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 또는 수난의 시인’43)이자 ‘서구식 모형의 개발 이데올로기와 그에 따른 파행적인 질곡의 역사에 정면으로 응전하며, 그 극복의 길을 추구해 온 대표적인 시인이다.’44) 신영복이 작품화한 「황토길」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모순과 질곡 속에서 수난당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신영복이 쓰고자 했던 저항시, 민중시의 작가와 작품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들은 우선 작품의 내용이 지닌 이념적 진보성과 민중성이다. 신영복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밑바닥의 소외된 사람들, 피지배 계층, 일반 서민, 그리고 불의한 시대의 압박과 모순에 맞서 저항했던 민중들의 정서였던 것이다.
마침내 신영복은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에 대한 근원적인 공감과 연민에까지 다다랐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낮출 대로 낮추어 더 낮아질 데가 없어서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의 견고한 토대를 만들어낸 것이니 ‘밑바닥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45)
신영복은 자신의 관념성을 척결하고 뜨거운 현실성과 구체성을 획득하려 했고 그 예술적 표현이 바로 신영복 한글 서예의 탄생이었다. 그가 내용 문제를 심각히 고민하게 된 이유 가운데 글씨가 ‘누구의 벽에 무슨 까닭으로 걸리느냐에 따라 그 뜻이 사뭇 달리지고 마는 - 강한 物神性을 생각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에 대하여 결코 無心할 수가 없었다’46)는 점도 중요하다.
신영복은 서예 작품 속에 저항성과 민중성을 가진 글들을 담아 자신의 사상과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변혁 운동의 ‘과정’과 ‘주체’를 나타내는 이 말 즉, ‘저항’과 ‘민중’의 개념과 함께 제시된 중요한 방법론이 ‘연대’이다. 이것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방법이자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다. 그의 한글 민체가 때로 ‘연대체’로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신영복 서예론의 중요한 목록이다. 연대의 사전적 개념은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이다. 신영복은 이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그 목표와 방향이 좀더 구체적이다. 신영복이 연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대체로 ‘下方’이라는 말을 함께 거론한다. 신영복이 쓰는 하방이라는 용어는 ‘下方運動’47)의 줄임말이다. 신영복이 말하는 연대는 그의 사상의 핵심인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자 사회변혁 운동의 방법론이다.
우리 학교의 사회교육원 노동대학과정에 있는 노조 간부들에게 연대(連帶)만이 희망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 바로 연대라고 생각합니다…연대는 반드시 하방(下方)연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대의 가장 상징적인 가시물(可視物)이 물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이 가장 큰 바다가 될 수 있는 원리가 바로 하방연대에 있는 것이지요…예를 들어 노동조합의 경우 연대는 여성, 비정규직, 해고자, 빈민, 농민들과의 연대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방연대가 연대의 기본입니다.48)
신영복 서예의 내용이 철저하게 그의 사상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그것이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사회 변화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노동조합, 여성, 비정규직, 해고자, 빈민, 농민’ 등 우리 시대의 가장 낮은 계층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연대의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전시 도록 표지를 장식한 ‘손잡고 더불어’<圖1>라는 작품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신영복 자신이 문인이자 학자이고 사상가로서 직접 글을 쓴다는 사실이다. 그는 뛰어난 문필가이다. 앞에서 살펴본 작가들의 글과 함께 다른 사람들의 글을 작품화하기도 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작품이 신영복 자신이 직접 창작한 글들이다. 이는 서체와 작품의 내용을 주로 옛것에 의존하려는 현대 서단의 상황에 비추어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自作으로 내용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없는 서단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동국의 발언49)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신영복은 한시를 창작하기도50) 하지만 대개는 일상적인 어휘를 새롭게 해석하여 간결하게 제시함으로써 색다른 맛을 내는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의 서예가 대중들에게 깊은 정서적 반향을 일으킨 핵심은 독특한 서체와 함께 평이한 문장 속에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담는 데 있다. 때로 그의 글은 빼어난 사상적 압축과도 같은 경구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처음처럼’<圖2>의 경우도 그렇다. 새로운 말이 아니지만 평범한 어휘를 독특한 서예 미학에 담아내면서 간결한 附記와 함께 ‘처음처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대중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들이 첫 전시의 도록에 실린 ‘한솥밥’<圖5>, ‘바깥’<圖6>, ‘너른 마당’<圖7>, ‘샘터찬물’<圖8> 등의 작품이다. ‘바깥’의 부기인 ‘너와 내가 만나는 곳’이라는 말은 지식인의 폐쇄적이고 개별적인 속성에 대한 비판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깥의 열린 공간, 현장의 공간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닫힌 공간에서 개별적인 나와 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공간 바깥에서 너와 내가 만나 관계를 형성해야한다는 당위의 선언인 것이다. ‘열린 대문 너른 마당 두레상 한솥밥’이라는 부기를 단 작품 ‘너른 마당’ 또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그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평이한 문장으로 신영복 자신이 갖고 있는 사상과 철학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 자신의 관계론적 사유의 결과물들을 대 사회적 메시지로 전환해내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신영복이 서예를 통하여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평이한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을 획득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지나친 의도성과 이념성을 담을 때 경직된 구호나 포스터가 되는 약점이 있는데 신영복은 이 한계를 극복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를 추구하다가 아예 현실을 표백해 버린 앙상한 자기만족에 빠지는 순수 예술의 오류에 빠지지도 않으며 이념성을 추구하다가 경직으로 흘러 대중들과 멀어지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는다. 신영복이 ‘작가와 독자가 멀면 예술이 아니’51)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글은 그가 살아온 시대와의 깊은 상호 작용의 결과물로서 시대를 성찰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문장은 산문이지만 빼어난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으며 비유와 상징, 시대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혜안을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그의 서체 자체의 형식 미학이 사상과 일체가 된 표현이기에 이는 나뉠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詩로 볼 수도 있고, 때로는 잠언이나 경구가 되기는 하는 문장들이 긴장감과 견고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2. 서체의 표현 양식
그의 붓글씨에 드러난 다양한 특징을 운필과 章法, 結構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字體의 형태를 분석할 때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방법과 전체에서 부분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있는데 사실 신영복 한글 민체의 경우 어느 것도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신영복의 글씨는 항상 전체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서론에 기인하고 있다.
畫의 成 ․ 敗란 畫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關係」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畫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獨存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字」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字」 또는 그 다음다음 「字」로서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그 중 한 字 한 畫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얼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落款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均衡에 한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濃密한 「相互連繫」와 「統一」속에는 이윽고 墨과 餘白, 黑과 白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對立과 調和」 그것의 統一이 창출해내는 드높은 「질」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화된 字, 字, 字의 단순한 量的集合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群棲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畫과 畫間에, 字와 字間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墨을 갈 적마다 人과 人, 間의 그 뜨거운 「連繫」위에 서고자 합니다.52)
자신의 글씨가 가진 특징에 대해 스스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규격화된 字, 字, 字의 단순한 量的集合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群棲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느냐’는 질문 속에는 궁체가 가진 특징과 한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말하자면 신영복은 궁체가 가진 규격화의 특성, ‘字, 字, 字의 단순한 量的集合’이 주는 개별성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규격화에서 탈규격화로, 量的集合에서 질적 결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신영복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앞에서 얘기한 관계론적 패러다임의 서예적 표현이다. 통일된 전체 속에서 부분의 가치가 드러나고 있음을 강조하는 신영복 서예의 특징상 부분을 전체에서 떼어 분석하는 것은 자칫 그의 글씨를 파편화할 위험이 있다. 다만 신영복 민체의 특성상 전체의 일부로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를 좀 더 유의하면서 분석에 임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한글 서예사의 흐름에서 신영복이 보여준 새로운 시도들을, 부분 분석을 거쳐 전체 분석을 가하는 방식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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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은 자음과 모음의 획의 起筆 부분을 모아본 것이다. 기필부분의 특징을 보기 위하여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 다양한 형태의 획들을 뽑아보았다. 붓의 특성상 붓을 지면에 대는 순간의 형태는 아주 다양해진다. 그러나 궁체의 경우 기본 원칙이 있고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신영복의 경우 붓을 지면에 대는 순간의 다양한 변화를 의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1처럼 逆入을 깊숙이 하여 원봉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와 대비되는 형태로 9, 10처럼 노봉을 쓰는 경우(물론 이것은 문장의 첫 글자의 첫 획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다른 획에 이어질 때의 모습이다)도 있고, 붓을 지면에 대는 순간 힘을 모았다가 바로 빼면서 거북의 머리 모양(3, 4)이 나오기도 한다. 7, 8처럼 역입을 가볍게 하고 노봉의 분위기를 내거나 11처럼 편봉을 쓰면서 기필하기도 한다. 다른 획에 이어진 획의 경우 2처럼 방필 형태가 나오거나 5, 6처럼 움직임과 변화가 많은 획이 나타나기도 한다.
획의 굵기는 전체 글씨를 보면서 설명할 때 온전히 그 특징이 드러나겠지만 16, 17의 경우 획의 굵기를 아주 가늘게 하여 변화를 주려고 한 경우이다. 지면에 대는 순간의 다양한 변화를 비롯하여 行筆의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힘의 변화와 굵기의 변화, 遲速의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힘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기필의 순간에 藏鋒, 露鋒, 圓筆, 方筆의 다양한 변화를 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음획이나 양획 모두 수평과 수직을 따라가지 않은 변화무쌍을 보이면서도 행 전체적으로 안정된 틀 속에 들어가 있다. 어느 한 起筆도 지루하게 동일한 필획을 보여주지 않고 있으면서 각각의 획은 전체의 작품이 구성하고자하는 미감에 기여하고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붓글씨가 신영복에게 와서 갑자기 새로운 획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의 학서 과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한문을 통하여 체계적인 운필을 익혔고 이를 한글에 적용하였다고 했다. 그가 사용하는 획들은 기필이나 收筆, 가로 획․ 세로 획․ 斜線의 진행․ 轉折 등에서 기존의 필법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학교 교수분들도 지금 서예를 배우고 있는데,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한글은 나중에 쓰도록. 우선 한자의 필획을 다 익혀야 되요. 물론 한글도 궁체, 판본체부터 먼저 할 거예요. 그 다음에 시도를 해야 되지 않는가.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전통에서 물려받을 것을 다 물려받은 다음에, 그 다음에 창조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53)
이것은 신영복이 성공회대 교수로 있으면서 그의 글씨를 배우고자한 다른 교수들을 가르칠 때 그가 가진 원칙이었다. 신영복은 과거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으며 과거로 들어갔고 그것을 딛고 창조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운필이 과거의 글씨들과 차별성을 갖는 특징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글씨에서 볼 수 없는 분명한 특징을 간직한 획들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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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에 있는 초성의 ‘ㅇ’은 기존의 한글 서예 운필과 형태에서 찾기 어려웠던 것들이다. 궁체의 필법에서 ‘ㅇ’은 한 번에 긋거나 좌우 두 번의 운필로 완성한다. 한번에 ‘ㅇ’을 완성하고자할 때 서자는 붓을 정돈하기 위하여 세 번 정도 머무르는 동작을 하게 되고 이것은 획의 안쪽과 바깥쪽이 모두 안정적인 원형을 만드는 필법이다. 그리고 궁체의 경우 흘림에서 변화가 있긴 하지만 ‘ㅇ’은 주로 선의 굵기를 일정하게 하는 게 기본 원칙이다. 판본체 필사나 목판의 경우 세모꼴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역시 세 번의 획을 고르게 하여 완성하는 게 일반적이다. 신영복은 ‘ㅇ'의 파격을 시도했다. 일단 원의 모양을 일그러뜨렸고, 세 번 이상 네 번이나 다섯 번까지 꺾는 轉折과 유사한 필법을 구사하였다. 전절은 한자에서 직각을 만들거나 예각 둔각을 만드는 등 직선이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때 쓰는 기법이다. 그런데 신영복은 원형을 만드는 획에 이것을 원용하였다. 궁체에서 붓의 방향을 구심력을 향하여 그어왔던 왔던 것과 정반대로 원심력의 방향으로 붓을 놀려 원의 모양을 만든 行筆인데 전혀 새로운 맛을 주고 있다. ‘ㅇ’의 특성이 부드러움인데 이 부드러움의 핵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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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종성 ‘ㄹ’을 보자.
<표 4> ‘ㄹ’과 횡획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
‘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표 4>의 원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이다. 이 획은 정자로 쓸 때 가로 세로 획을 따로 분리해보면 총 5획이고 궁체의 반흘림은 마지막 획이 대체로 둥글게 마무리된다. 위 작품에서 ‘ㄹ’은 4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자의 ‘ㄹ’을 보자. 첫 획과 두 번째 획으로 'ㄱ'을 만들고 세 번째 획으로 좌상에서 우하로 둥근 획을 그은 후 마지막 획이 길게 벋어 있다. 마지막 획이 3번째 획의 왼쪽으로 튀어나오게 쓴 것(○ 부분)이 새롭다. 획의 마무리가 파책처럼 꼬리를 남기는 것(△ 부분)도 ‘ㄹ’의 새로운 운필이다. 한자나 한글 모두 그동안 ‘세로쓰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이 세로쓰기의 경우, 붓의 흐름상 횡획이 삐침으로 처리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한자의 행서나 초서라 하더라도 세로쓰기의 특성상 횡획의 마무리는 붓이 머물면서 털끝을 모으는 지점이기 때문에 횡획의 끝을 삐침으로 처리한 것은 신영복이 가로쓰기를 하면서 시도한 새로운 운필이다. 가로획이 삐침으로 끝나는 경우는 예서의 파책에서 유일하게 존재했었고 한글에서는 흘림이라하더라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永字八法의 획 중에서 磔이 45도로 내리 뻗는 것을 볼 수 있는 정도다. 이러한 현상의 중요한 원인은 신영복의 가로쓰기와 관련이 깊다. 한 글자의 끝 획이 세로획으로 끝날 경우 마무리에서 붓의 힘을 빼는 것은 가로쓰기의 다음 글자로 이어지는 선이기 때문에 당연히 필요한 변화이다. 따라서 기존의 세로쓰기에서 둥근 획으로 마무리 되는 ‘ㄴ’, ‘ㄷ’, ‘ㅌ’, ‘ㄹ’의 끝 획이 신영복의 가로쓰기에서는 대체로 무겁지 않게 처리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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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한글 민체의 변화성과 역동성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핵심으로서 세로획의 운필과 형태를 살펴보자. 세로획에 신영복이 의도하는 역동성과 변화성을 풍부하게 하는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 <표 8>에서 보듯이 우선 수직으로 얌전히 내려가는 경우가 없다. 한번을 꺾든 두 번을 꺾든 방향의 변화를 주고 있다. 곡선의 형태로 두 번 방향을 바꾼 1, 2나 세 번 방향을 바꾼 3,4,5경우가 있고 한번으로 곡선의 형태를 취한 7과는 다르게 8의 첫 번째 세로획의 경우는 물결 흐르듯이 곡선의 형태가 계속되고 있다.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진 것(1, 3, 7),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것(2, 6), 곧추선 것(5, 8) 등으로 나타난다. 끝 부분의 방향도 주목할 만하다. 세로쓰기의 경우 1,2,3,4처럼 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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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획의 다양한 변화는 세로획 홀로의 모습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의 획과 자형, 그리고 뒤에 올 획과 자형까지 염두에 둔 운필이며 전후좌우의 균형을 잡거나 조화를 위해 일어난 변화이다. 세로획을 그을 때 그동안 시도된 새로움은 획의 굵기에 변화를 주거나, 머리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다. 세로획의 변화는 예를 들면 ‘ㅣ’의 획 한 부분을 꺾어 行筆하는 예가 있었다. 붓의 방향을 한번 바꾸는 것이다. 주로 아래로 향하다가 왼쪽으로 꺾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세로쓰기의 특성 때문이다. 신영복의 경우 지나친 각도를 주는 것은 아니고 붓의 흐름에 의지하는 듯 하면서 최대한 의도성을 감추고 있다. 붓을 흐름을 유연하게 따르지만 힘의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 의도 속에 의도를 감추고 있는 운필이다. 붓의 방향을 적어도 2번 이상 꺾는 시도를 하고 있으나 억지스럽지 않다. 궁체 이후의 다른 서예가들이 변화를 주려고 했던 경우는 궁체의 머리 부분이 왼쪽을 향해서 기울어진 데 반해 머리 부분을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는 특성이 있었다. 이런 경우 세로획은 무게 중심이 오른쪽으로 넘어지려는 분위기를 갖는다. 이러한 획 또한 변화와 역동성을 갖는다. 신영복의 경우 세로획과 반대로 아래가 오른쪽으로 나아감으로 해서 획의 머리가 왼쪽으로 넘어질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획은 상당한 불안감을 가진 형상인데 글씨 전체에서 역동성과 물이 흐르는 듯한 유려한 미감을 창출하는 주동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초성의 ‘ㅇ’과 종성의 ‘ㄹ’, 그리고 가로획과 세로획 ‘ㅣ‘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영복이 새롭게 시도한 초성 ‘ㅇ’의 경우 원형의 틀을 깨면서 심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궁체의 경우 최대한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궁체 흘림의 경우 변화가 생기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원형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중심점을 두고 원형을 완성한다. 신영복의 파격은 ‘ㅇ’을 삼각형으로 바꾼 형태보다 더 심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신영복 글씨의 자음 가운데 가장 강한 변화와 역동성을 드러내고 있다.
‘ㄹ’ 경우 ‘ㄹ’로 표현할 수 있는 변화를 최대한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태를 다양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획의 굵기나 선의 방향을 끊임없이 바꾸어 나감으로서 변화와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모음의 ‘ㅣ’에서 더욱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신영복의 거의 모든 획이 직선인 경우가 거의 없는데 특히 ‘ㅣ’모음에서 가장 심한 곡선과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의 음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형태와 線質의 변화가 음운 자체만을 위한 변화가 아니라 주변 글자의 형태와 조화를 최대화하려는 형태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점이다.
장법과 결구를 분석하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더불어 숲’이라는 하나의 문구를 작품화한 <표 9>를 보자. 이 작품들은 한꺼번에 의도적으로 다르게 쓴 것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다른 작품들이다.55)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것도 있고 행사할 때 쓰기 위하여 현수막에 인쇄한 것도 있다. 여러 작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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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삼각형으로 처리된 ‘ㅇ’이다. ‘ㅇ’의 형태가 모두 삼각형으로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더불어 숲’이라는 문구의 지향성과 음운들의 특성 때문이다. 이 여섯 개의 작품들이 가진 공통점은 모두 글자들을 붙여 쓰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바로 ‘더불어 숲’이라는 문구가 지향하는 연대의 감수성이다. 민중 운동에서 그가 강조하는 연대의 의미는 앞서 논의한바 있다. 연대는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 것이고 관계를 단단히 하는 것이다.56) 따라서 글자와 글자를 연결하여 연대의 감수성을 표현하려는 신영복의 의도를 읽게 된다. 그런데 ‘불’의 ‘ㄹ’과 ‘어’의 ‘ㅇ’이 만나려면 ‘ㄹ’의 끝 획이 위로 올라가든가 ‘ㅇ’이 전체적으로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렇게 하려다 보니 ‘ㅇ’이 앞에서 예를 들었던 것과 같은 다양한 형태(표 7)를 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원심력과 구심력을 뒤섞어 놓은 <표 7>의 ‘ㅇ’ 형태는 대체로 좌상에 무게 중심이 실리면서 좌하 부분이 비어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밀집된 형태를 취한 2의 경우만 ‘ㅇ’이 ‘ㅜ’의 가로획과 만나고 있다.
선의 굵기에도 변화의 특성은 확연하다. 한 글자 내에서도 모든 획의 굵기를 다르게 하든지 아니면 방향을 바꾸든지 하면서 계속 변화하고 있고, 한 작품 내에서 모든 선의 굵기가 다르다. <표 9>의 작품의 장법을 보자. 1은 글자를 납작하게 하여 썼고 그와 대비되는 형태로 2는 글자들을 세로로 길게 하면서 굵기를 강화하였다. 2번이 씩씩한 분위기를 주는 반면 6번은 어딘가 수줍은 듯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러면 이러한 형태와 線質이 가진 미감은 무엇일까. 미감은 과학적 결과라기보다는 정서적 반응이기 때문에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앞서 보았듯이 신영복의 민체가 주는 특징은 객관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다른 형태와 획․선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변화와 다양성이다. 또한 신영복이 추구했던 기본적 성격, 즉 ‘궁체로 표현되지 않는 정서’를 참고하여 보면 그의 글씨가 주고자했던 미감과 정서가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변화와 다양성이 주는 미감은 力動性이라 할 수 있다. 역동성은 변화성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역동성은 획의 기울기와 관련이 깊고 변화성은 획의 굵기와 관련이 깊다. 궁체가 수평과 수직의 선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안정성을 주기 때문이다. 궁체가 지루함을 주지 않는 선에서 굵기의 변화를 주는 반면 신영복은 변화성 자체를 목적으로 한 듯이 굵기의 변화를 주고 있다. 그것은 안정보다는 불안정을, 정지보다는 전진을, 수동보다는 능동을, 감추기보다는 드러냄을, 질서보다는 무질서의 미감을 준다. 이것은 궁체가 글자 한자 한자의 자기 완결성을 갖는 데서 발생하는 안정성의 미감과 대비되는 방향의 미감이다. 또한 각자가 자기 완결성을 갖는 서체로서 궁체가 개별 글자의 양적 결합, 물리적 결합에 가깝다면 신영복의 한글 민체는 질적 결합이자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궁체가 개별 존재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성립된 서체라면 신영복 한글 민체는 畫과 畫, 字와 字, 行과 行이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형성된 서체이며 전체로서의 균형과 조화를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관계론적 사고의 서예적 표현이다.
그의 한글 민체 가운데 연대의 감수성을 특히 강조하고자 한 경우 글자와 글자를 서로 닿게 하는데 이런 경우 한 글자를 떼어내서 보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글자를 붙이지 않은 경우라도 한 글자를 따로 떼어내 놓고 보았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풍기는 미감은 확연히 다르다. 물론 궁체라고 해서 장법이 없는 것도 아니며 흘림체의 경우 문장의 흐름에 의해 결구가 결정되고 이것이 장법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궁체는 흘림이라 하더라도 한 글자 자체의 기본 틀이 있고 이 틀에서 형태상의 변화가 미세하게 발생할 뿐이다. 신영복은 궁체의 개별적 존재성을 관계론적 미학 속에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궁체의 창작 주체는 궁녀였고 사용자의 측면에서는 왕족들의 것이었다. 일반 서민의 접근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다. 궁체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정통 서단과는 반대로 신영복의 글씨는 서단이 가진 질서와 권위 밖에서 시작되고 확산되었다. 신영복 민체의 형성은 궁체가 가진 엄정, 단아, 절제, 겸손, 인내의 궁중적․귀족적 정서의 미감과 권위를 해체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풀어헤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그가 살아온 삶의 과정과 일치되는 정서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과 사회구성원들의 존재 양식을 규정하는 하부구조로서의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혁명운동가로서 그가 가진 세계관이 글씨에 배어 들어간 것이다. 글자와 글자가 서로 손을 잡고 있거나 어깨와 다리를 걸치거나 허리를 감고 있는 것이 이 작품들의 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관계을 중시하는 신영복의 사상과 직통하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던 혁명, 그 강력한 사회 변화의 열망이 변화무쌍한 선과 형태를 바탕으로 한 역동적인 서예로 드러난 것이며 그 목표를 위해 그가 제시한 방법론은 끝없이 자기를 낮추어 거대한 바다를 물처럼 절대 다수의 대중들이 강고한 연대를 통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80년대 미술 운동에 나타난 민중적 감수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겠다. ‘민중적 감수성’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서예 용어에서 사용된 적이 없다. 한국 서예사에서 저항적 민중의 정서를 표현한 서예는 등장한 적이 없다. 훈민정음체가 지배계층의 완고한 위엄과 무게를 표현한 예술 미학을 가지고 있다면 궁체는 단아한 궁중 여인들의 정서를 완벽하여 구현하여 한글의 대표 서체가 되었다. 이후에 몇몇 새로운 서체가 시도되어 각각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신영복이 구현해낸 한글 민체의 미학적 감수성은 민중성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서예사의 한 길을 열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작가들이 보여준 길들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고 신영복은 신영복 나름대로의 예술관과 작품을 보여주었다. 신영복 한글 민체는 민중적 서예 미학의 출발이자 새로운 길이다. 이는 민중적 요구가 거대하게 분출하던 시대적 분위기와 어울려 그 시대의 한 역사적 흐름을 짚어내고 이를 서예로 집약해낸 것이다. 신영복은 시대정신의 한 특징을 담아낸 작가로 평가해도 무난하리라는 판단이 든다. 섣불리 완성을 얘기해서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서예사에 민중적 감수성과 미학의 출발을 알리는 강력한 신호탄이라는 점은 부인될 수 없을 것이다.
IV. 한글 서예의 시대정신과 평가
1. 대중성
필자가 신영복의 한글 서예를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기로 한 중요한 이유는 그의 글씨가 지금 우리 시대의 가치 가운데 하나를 잘 포착해내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술적 성취도 의미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대중적 감염력을 가지고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판단에 다른 것이다. 이 세 가지 평가는 필자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객관적 근거가 전무한 것이라면 연구 대상으로서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신영복의 글씨가 예술적 성취를 어느 정도 달성해내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 잣대를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의 글씨가 추구하고 있는 민중성과 서민적 감수성을 역으로 적용하여 그의 글씨의 예술성을 말할 수도 있다. 대중적 반응의 정도에 따라 그의 글씨의 성취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글씨에 기존 서예의 기준을 적용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접근이 오히려 타당할 수도 있다. 기존 서단이 개척해내지 못한, 말하자면 서예의 새로운 영역을 확대하고, 서예술 영역의 밖에 있던 독자들을 서예의 세계로 유도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신영복 한글 민체의 현실적 위치와 대중적 감염력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 가운데 하나는 최근 그의 글씨 ‘처음처럼’(圖47)이 소주의 상품 로고로 쓰인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이밍(naming) 업체와 사내 공모를 통해 제시된 브랜드 이름은 무려 2,000여개. 최종 테이블에서 ‘아하’ ‘단비’ ‘새날’ 등과 경합을 벌이다 ‘처음처럼’이 낙점됐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 알려진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시 ‘처음처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시에 담긴 ‘처음’의 신비감과 설렘을 담아 기존 소주와는 성분, 컨셉트, 맛에서 차별화된 제품임을 어필할 수 있다는 데 모두가 공감했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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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씨에 대한 대중적 수요를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예로 신영복 서예의 디지털 폰트화58)를 들 수 있다.(표 10) 경필의 단조롭고 단순한 線質에서 벗어나 예술적 표현이 가능한 붓글씨가 디지털과 만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해내고 있다. ‘따뜻한 느낌이며 못난이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의 뒷골목의 모습과 못난 종지들이 어우러져 있는 시골스러움이 살아있다’59)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미 많은 붓글씨 서체들이 디지털 작업을 거쳐 웹상에서 ‘붓글씨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글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60)
상품 로고와 디지털 폰트화는 신영복 한글 서예의 대중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 두 가지는 시장성 조사를 거쳐 상업적인 목표로 진행된 일들이다. 디지털 폰트의 경우 작자의 시간과 노력은 물론이고 업체 측에서도 제작비 자체가 적지 않은 부담을 주는 사업이다. 개발 기간도 3년에 걸친 작업이었다고 회사측은 밝히고 있다.61) 그것이 시판을 목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지명도, 인지도는 물론 대중들의 선호도가 낮다면 개발비를 투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신영복의 글씨가 대중들과 접촉하는 지점은 다양하다. 크게 상품 로고, 책의 제호, 현판, 비문, 달력, 간판 글씨 등을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서예 활동 중 주목해야할 부분은 현판과 비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판은 다음과 같다.
금산사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圖1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圖14), <나주시청>(圖15), <민주언론운동협의회>(圖16), <민주노동당 부설 새 세상을 여는 진보 정치 연구소>, <부산 경남 통일 교육 센터>, <전국공무원 노동조합 부천시지부>, <코리아 루트>, <녹색연합>, 평화시장 전태일 거리 <횃불사람, 제 몸을 불살라 인간의 길 밝히다>, <여성평화의 집>, 민주화 운동 유가족협의회 <한울삶>, 부산 <민주항쟁기념관>, <우면산 터널>, <민주공원묘역 추진위원회>, <두무개 다리>, 상암 월드컵 경기장 역 <네 손은 내가 잡고 내 손은 네가 잡고 새 하늘 바람 되어 이 땅의 꽃이 되어>, 부산 <민주항쟁기념관>, <우면산 터널>.
비문의 경우 신영복의 관심과 사상적 경향을 알 수 있는 예들이므로 주요 내용을 함께 제시한다.
<여순사건 위령탑(전남 구례)>(圖17), <벽초 홍명희 문학비>(圖18), 5․18 첫 희생자 이세종 추모비<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전북대학교)>(圖19),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이끄신 농민운동가 권종대 선생 추모비(경북 영덕)>(圖20), <서울시립대학교 학생운동탑, 시대와 더불어 민중과 함께>(圖21), <오대산 상원사>, <유월민주항쟁진원지, 유월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 부마항쟁 기념비 <유신철폐 독재타도, 민주주의 신새벽 여기서 시작하다>, 4․19의 기폭제가 된 희생자 <김주열 열사>, <강제징집 녹화사업 내 육신 영혼을 찢는다 해도 어두움을 뚫고 시대를 넘어 부활하라 녹두꽃의 상흔이여, 고 한영현 열사 추모비>, <통일의 선구자 겨레의 벗, 늦봄 문익환 목사>, <모란공원 민주열사 추모비>, <민족민주열사 우종원 김성수 추모비, 사랑하는 벗이여 꺾이고 짓밟힌 그대여 그대를 일으켜 손에 손잡고 함께하리라>, <박봉우 시비, 휴전선>, <순교 추모비(성공회 대강당)>, <박래군 시비, 어서오라 민주 통일의 날이여>.
신영복 글씨가 사람들과 가장 많이 만나는 지점은 출판물이다. 그의 글씨가 달력(圖22, 23)으로 만들어져 해마다 시판되는 것은 전문 서예가들에게서도 드문 경우이다. 제호를 만든 책들은 다음과 같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圖24), '나무야 나무야'(圖25), '강의'(圖26), '더불어 숲'(圖27) 등은 신영복 자신의 저서에 직접 제호를 쓴 경우이다.
단행본과 언론 매체, 정기 간행물에는 '반일 그 새로운 시작'(圖28), '여럿이 함께'(圖29), '논어의 자치학'(圖30), '한강'(圖31), '희망의 인문학'(圖32), '사람이 희망이다'(圖33), '우붕잡억'(圖34), '아름다움을 훔치다'(圖35), '민주경희'(圖36), '시민과 세계'(圖37), '가족이야기'(圖38), '기억과 전망'(圖39), '사회복지대백과사전'(圖40), '충무공 이순신'(圖41), '분단시대의 법정', '나무가 나무에게', '돈명이 할아버지', '염상섭', '시민사회 신문', '부안독립신문', '전국노동자신문', '전국농민신문', '성공회대학보'등이 있다.
방송 프로그램의 제호로 KBS 다큐멘터리 <인물 현대사>(圖42) , MBC 드라마 <좋은 사람>(圖43), 그리고 오페라 <수천>(圖44)의 로고를 썼다. 영화 제목 중 신영복이 쓴 것은 2007년 개봉한 영화 '황진이'62)(圖45) 타이틀 로고이다. 이것은 북한 소설가 홍석중의 원작 소설 '황진이'63)를 남한에서 최초로 영화화한 것이다.
신영복의 폰트 글씨를 사용한 상품 로고 <현미 흑초>(圖46)에서 보듯 다양한 상품들이 신영복의 글씨를 사용하고 있다.
7신영복의 글씨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심미적 기준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신영복이 쓴 글씨의 내용들을 보면 대체로 그 윤곽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신영복의 평소의 발언이나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결함을 해결하고 극복하고자하는 노력들과 연대하고자하는 위치에 있고 그의 글씨의 내용을 통하여 이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것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글씨에서 보이는 민주, 노동, 민중, 생태 등의 가치는 우리 사회의 진보적 이념들과 잇닿아 있는 것들이 많다. 가장 오랫동안 유물로 남게 되는 비문의 경우 신영복이 쓴 글씨들은 우리 사회의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저항 운동의 중심 축이었던 통일과 민주주의 등에 집중되어 있다.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비문,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비문 글씨 가운데 최근의 것들은 거의 신영복의 글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에는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64)
신영복의 글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신영복의 삶이 주는 상징성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영복의 글씨가 주는 민주적, 민중적, 연대적 감수성과 미감 그리고 그의 글씨와 그 자신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이미지가 가장 분명한 선택의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최근 신영복 글씨에 대한 수요가 그의 辛酸스러운 삶에 대한 연민이나 또는 일부 계층에서 자신의 희생을 대신해 준 것에 대한 보상 심리의 하나일 수 있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들은 결코 그렇게 연민과 보상 심리로만 예술을 대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신영복처럼 사회 변혁 운동에 참여하여 오랜 기간 저항의 삶을 살며 수배와 투옥을 되풀이한 사람으로 김지하가 한글을 쓰고 묵란을 그렸는데65) 그의 한글 글씨는 대중화에 이르지 못하였다. 물론 김지하는 글씨를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한글 서체를 만들려 했던 것은 아니다. 김지하에게 글씨를 가르친 무위당 장일순(1928~1994) 역시 우리 사회의 저항운동의 한 구심점을 이루었던 사람66)으로 오늘날 「한살림」67) 운동의 선구자였다. 유홍준은 장일순의 한글 글씨가 한문 예서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소탈한 맛’과 ‘부드럽고 편안한 글씨’<圖12>라고 평했다. 그는 세 차례나 전시회를 열었고 적지 않은 글씨와 그림을 남겼지만 그의 글씨가 대중들에게 전파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신영복 한글 민체에 대한 대중적 요구는 그의 글씨가 주는 확고한 미감과 친화력이 있다는 것이다. 신영복의 서예 미감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시대정신
어느 시대든 그 시대가 처한 조건과 상황은 변화무쌍하지만 문화와 예술은 당대의 사회를 구성하는 전체 구성원들의 의식의 총량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술가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예술의 양식이 있겠지만 그것은 모두 그 시대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전체 구성원들의 이해와 요구 그리고 욕망의 결집이며 어느 시대든 그 시대 나름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만한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형성된 예술이 있고 그 예술 가운데 어떤 것은 그 시대의 중요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살아남아 평가 받기도 하지만 어떤 예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사라진 예술도 그 역할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모든 예술이 유의미한 가치로 남는 것은 아니다. 당대에 중요한 흐름이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예술이 쉽게 그 힘을 잃기도 하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평가 받지 못하던 예술 경향이나 작품이 뒷날 중요한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역사상 각 시대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은 당대 사회의 권력과 밀접한 영향 관계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권력의 힘이 강력하게 예술의 형식과 양태를 강제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한 사회의 중심 권력의 밖에서 거대한 흐름이나 힘을 형성하여 독특한 예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권력이 무엇에 의해 움직이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 집단과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중심에 어떤 힘이 작용하느냐에 의해 예술의 양식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70~80년대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과 예술의 흐름은 지배 권력과 그에 대항하는 권력의 대립이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에 속한다. 그 시기는 한국 현대사에서 지배 세력에 저항하던 예술과 문화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조직과 이론적 무장을 거쳐 지배 권력의 해체에 역동적으로 참여하고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이다. 한반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체제로 나뉘어 적대적 대립과 긴장 속에 놓여 있던 이 시기의 저항 예술은 우리 사회가 가진 복합적인 모순들이 대립하며 하나의 독특한 특징을 가진 민중 문화 예술을 탄생시켰던 시기이다. 남한과 북한의 대립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각각의 체제가 가진 내부의 조건들이 갈등하면서 강렬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본 논문의 핵심 주제인 신영복의 한글 서예의 탄생 배경과 관련하여 볼 때 신영복의 사회변혁 운동과 투옥의 과정은 남북의 대치 상황과 남한 사회의 지배 권력의 특성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가 쿠데타를 통해 파시즘에 가까운 산업화 전략을 택한 것은 훗날 그 평가의 양면을 보이는 것과는 관계없이 내부에 강력한 저항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발전 우선 정책을 펼치면서 노동자들의 희생과 인권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냈고 끊임없이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마찰을 빚어야 했다. 또 냉전적 세계 질서에 편승한 극단적 반공 정책을 내세우며 사상적 자유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정치적 경쟁 세력까지 이념적 올가미를 씌워 탄압하면서 내부의 모순을 키워가고 있었다.
신영복이 활동하고 감옥에 간 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박정희 정부의 붕괴(1979년)전 10여년의 시간과 붕괴 후 10여년을 보여주는 기간이다. 앞의 시기는 산업화라는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며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의 힘을 키워가는 시기이자 한편에서 경제 성장의 그늘에서 숨죽이며 허덕이던 세력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산발적으로 저항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저항의 형태가 복합적이기는 하지만 파시즘적 군사 정부의 해체와 민주적 권력 형성을 요구하는 하나의 방향이 있었고, 산업화가 가져온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는데 전자를 자본주의 체제 내의 민주주의를 향한 저항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본주의 자체가 가진 모순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좌파적 이념성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세기 제 3세계의 급진적 지식인이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가미된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되는 것은 보편적 경로라 할 만큼 흔한 일’이었고 신영복이 사회주의자로 성장하게 된 데에는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척박한 현실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68)
박정희 정부 붕괴 후 10년 기간은 전두환, 노태우 정부로 이어지며 지배 권력의 파시즘적 성격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것은 저항을 시작한 민중들의 움직임이 보다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적 지식인과 소외 계층을 중심으로 한 저항 세력이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며 국민적 힘을 얻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성격에 대한 논쟁, 민중운동, 노동 운동 등을 통하여 노동자 계급의 대두가 있었으며 그간 회피되었던 모순문제 곧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문제가 전면 제기되어 한국사회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69) 그 흐름의 문화 예술적 성숙 단계가 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이다. ‘80년대 민중예술은 우리의 문화계에 일찍이 없었던 운동이다. 민중시․민요 찾기․마당극․민중미술․노래운동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민중문화를 지표로 한 예술 운동이 벌어졌다.’70)
우리의 민중문화운동은 60년대의 민족주의적 자각과 전통 회귀를 통해 그 맹아적 운동 형태를 획득하였고, 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그 기본논리와 방법론을 갖추었지만, 민중문화운동의 확고한 운동이념과 운동 이론에 도달한 것은 1980년대 초의 역사적 경험이었다. 민중이 역사의 선언적 주체로부터 역사의 실천적 주체로 부상한 이 민중 체험을 지식인 중심의 문화 운동 논리의 재정립을 강요하였으며, 민중에 의한 민중문화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하였다. 71)
이러한 흐름이 결국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읍 지역의 370여개소에서 1백여만 명이 참가한 시위가 벌어지는’72) 87년 6월 전 국민적 민주화 운동을 통하여 더 이상 남한에서 군사 정권의 독재가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사회 변혁운동 과정에서 그 이념의 문화예술적 이론과 실천이 이루어졌고 한국 역사상 저항 문화가 70~80년대처럼 구체적 내용과 성과물을 남긴 사례는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그 시기의 민중문화예술은 매우 중요하다.
신영복 한글 서예를 분석하면서 80년대를 거론하는 것은 그것이 물론 70년대와 그 이전의 시기에 싹트고 자라나기 시작한 문화운동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80년대야말로 우리 사회의 문화 운동이 거대한 힘을 형성하였기 때문이고 바로 그 시기에 신영복의 한글 서예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신영복이 쓰고 싶었던 민요와 민중시․저항시의 주요 개념이 저항 세력들의 중요한 문화 예술적 주제로 자리잡아가던 시기인 것이다. 저항 세력들이 스스로 문화 예술적 역량을 갖추어 나가면서 지배 권력을 향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성장과 민중운동73)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에게 ‘민중’의 함의는 우리 민중이 우리 역사의 주체-객체로 되는 순간에 나타났다. 즉, 그것은 1894년에 있어서는 반봉건적 반외세적이며, 1919년에 있어서는 반 제국주의적이며, 1960년에 있어선 반독재적이다. 즉 그것은 민족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정향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외 예속을 대가로 하는 외자에 의해, 그리고 군부 엘리트, 기술 관료의 권위주의에 의해 수행된 60년대 이후 산업화 시기에 있어서 더욱 첨예화되었다.74)
이러한 움직임은 예술을 사회 변화와 혁명의 도구로 인식하는 계급적 시각과도 관련이 있다. ‘문학․예술이란 그 사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반영한 것이며, 인류 사회의 한 단계를 반영한 것이라는 입장’이고 따라서 ‘예술의 형식과 내용이 그 사회의 발전과정과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게 마르크스 예술관의 기본 성격이다.75)
예술 분야에서 서예와 가장 가까운 것은 미술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시각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전시 형태를 통해 대중과 만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1980년대 민중미술은 기존 한국미술의 폐해를 비판하고 정치적․사회적 현실을 수용하여 한국미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하게 된다.76)
70년대 중반부터 <제3의 그룹>이라든가 69년 <현실> 동인전, 74년의 <12월>전 등을 모태로 정치, 사회, 역사적인 주제와 현실 비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소집단 활동이 기억될만한 운동으로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해갔다…80년대 한국 미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변혁에의 주체적 의지와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스스로 자각과 세계성에 눈뜨기 위하여 자신의 삶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순을 극복해 가려하는 변혁인 것이다. 이러한 미술은 70년대 후반부터 싹트기 시작한 구상회화를 토대로 80년대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77)
미술인들이 현실 참여의 기치를 들고 변혁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삶과 현실의 모순을 극복해가려하는 운동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한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의 변화 속에서 한 치 앞도 예견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치적으로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이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져 반독재 투쟁, 통일운동, 민주투쟁, 학생 데모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민족의식은 더욱 고양되어갔다.’78) 문화예술의 흐름 가운데 하나가 이러한 민주적 요구와 민족의식의 고양을 예술 표현의 정서적 모체로 받아들였다는 점이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미술이 갤러리 아트의 틀을 벗어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서예는 다른 방향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로 전통의 계승 문제와 개성의 표출에 관련된 것들이다. 서예가들이 과거의 틀에만 안주한 것은 아니다. 작가들 나름대로 새로운 길을 찾으려 애쓴 것이 현대서예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아울러 붓과 먹이라는 전통적 재료의 틀을 벗어나고자하는 노력, 재료와 도구의 확대를 위한 탐색, 서체의 변화를 위한 노력 등이 거론될 수 있다. 큰 방향에서 보자면 예술의 개성 중시 현상이 서예계로 확대되어간 것이고 이러한 경향은 우리 문화 예술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꽃피었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시대정신의 하나인 민주주의, 민중, 사회변혁, 저항, 시민운동, 노동 등의 가치를 서예술로 표현해 내려한 예는 없다. 문제는 신영복의 한글 서예와 시대정신이 얼마나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느냐이다. 신영복의 서예 이력과 80년대의 접점을 살펴보자.
신영복의 옥중 편지를 모아놓은 책 '엽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서화 활동의 출발 시기는 1976년 무렵이다. 76년 5월 31일 엽서에 가족이 감옥으로 ‘필묵’을 우송하였다는 언급이 보이며, 7월 5일 엽서에 ‘書畵班’ 활동을 시작하여 ‘月餘째 그림과 글씨를 공부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후의 엽서에 서도에 대한 언급이 늘어난다. 81년에는 이미 감옥에 있는 신영복의 손에 五體字彙와 書帖 등이 쥐어져 있었다(81년 8월 27일 엽서). 이때는 혼자서 붓글씨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이며 동양 고전에 대한 학습이 병행되고 있었다. 81년 말(10. 21.엽서)에는 吳唐紙 구입을 의뢰하는 글을 쓰기도 한다. 화선지 구입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붓글씨와 그 재료에 관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익히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이때 숙모님들, 먼 친척 아주머니들처럼 순박한 農夫와 陋巷의 體臭가 배인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다고 고백하거나,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나도 쓰면 쓰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수수한 글씨를 쓰고 싶다고 말하는데(81년 11월13일) 이미 그는 붓글씨에 심취하면서 의미 있는 방향을 찾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영복의 이 발언이 그의 한글 민체 발전 과정상 얼마나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발언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는 이 무렵 궁체가 아닌 다른 글씨에 대한 분명한 의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書道는, 그 形式에 있어서는 民族的 傳統에 비교적 충실한 반면 民衆의 美的 感覺과는 멀고, 그 內容에 있어서는 東道를 主體로 삼되 封建的 限界를 벗지 못하고 있어 明暗半半의 실정임이 사실’이라는 발언이 82년 2월에 나오는데 그는 이때 붓글씨의 가능성과 궁체의 한계를 감지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붓글씨가 훌륭한 민족적 유산이지만 그것이 민중의 미적 감각에 멀어져 있다는 판단은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붓글씨를 예술의 정서로서 분석하며 거기에서 기존의 미감 가운데 민중적 미감이 결여되어 있음을 분석해낸 것은 놀라운 것이다. 이 시기는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고 민중적 저항이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시기이다. 문화운동의 싹도 자라가고 있던 시기이다. 이때 신영복은 감옥에서 민중의 미적 감각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진 지식과 예술적 감수성으로 붓글씨가 민중적 미감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매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의 씨앗을 보여 주는 발언이라고 할수 있다. 조병호에게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82년도에 이르러서이다(3월 8일 엽서). 그 후 신영복이 전주 교도소로 이감할 때(86년 2월)까지 조병호의 방문은 계속된다.
앞서 살펴본 시대적 조건과 개인의 사상이 만나, 수단으로서의 예술관이 투사된 서체로서 신영복 한글 민체가 형성된 것임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서예인들이 문화예술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항 서예의 불모지에 확고하게 진보적 이념과 내용을 가지고 신영복이 한글 민체를 빚어낸 것이다. 전문 서예인이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진화해나간 글씨가 아니라 글의 내용과 혼융되는 글씨가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궁체의 글씨가 그 글씨에 어울리는 내용이 있듯이, 박노해 또는 신경림의 글이 갖는 특성과 서체의 미학적 특성이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서예 미학이 필요하다는 목적의식적 노력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의 단계로 나아간 궁체의 경우와도 다르고, 집단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예술적 목표를 위해 글자 자체의 미학적 완결성을 추구해 나간 경우와도 다르다. 또한 이는 이른바 민체라고 명명된 숱한 민간 필사본의 고졸한 서체들이 만들어지게 된 경우와도 다르다. 민간 필사본의 글씨는 서법을 위한 운필의 학습과정이 체계적으로 전수되지 못한 일반 백성들이 스스로 실용적인 필요성을 충족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미학적 고려가 목적의식적으로 진행된 글씨가 아니다. 신영복의 안목을 주목해야할 이유는 바로 시대의 한 특성을 집약해내는 ‘집단적 개인’으로서의 역량이다. 그는 전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 입법자적 역할을 감행하고 있다. 그의 글씨가 단순하게 격렬한 운동성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의 고단함과 푸근함을 담게 된 비밀은 곧 그가 어제의 요구를 바탕으로 내일을 길을 열어간 데 있다.
앞서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변혁 운동의 과정과 특징이 신영복이라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된다는 점이다. 신영복이 가진 사상과 사회 역사적 조건의 충돌이 빚어낸 산물, 그것이 그의 한글 민체이다. 사회적 계급간의 모순과, 외세의 억압으로 인해 빚어진 민족모순의 시대 조건이 그의 삶에 반영되어 있고, 시대의 조건에 대한 그의 응전이 사상과 학문 그리고 예술에 반영되어 있다. 그것이 80년대라는 시기를 통하여 피어난 신영복의 예술이었다.
3. 신영복 서예에 대한 평가
신영복 한글 민체의 다양한 명칭을 검토하면서 신영복 서예에 대한 서단과 일반인들의 평가를 살펴보자.
그의 한글 민체에 대해 붙여진 이름들은 ‘연대체’, ‘어깨동무체’, ‘협동체’, ‘어울림체’ 등이 있고, 최근에 궁체 이외의 自家 서체에 대한 포괄적 개념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용어인 민체를, 신영복은 ‘궁체의 귀족적인 특성과 대비되는 서민적 정서가 배인 글씨’라는 뜻에서 자신의 서체의 이름으로 쓰기에 적절한 것 같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밖에 창작주체인 신영복의 이름을 그대로 써서 ‘신영복체’라고 쓰기도 한다. 이동국은 신영복의 호를 따서 ‘쇠귀체’라 이름하였다. 서체 이름은 아니지만 신영복 한글 민체를 일컬어 ‘민중서예’라고 한 조희연(1956~)의 경우도 그 지칭하는 대상은 같다.
하나의 서체에 대하여 신영복의 경우처럼 다양한 명칭이 부여되는 경우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신영복의 서체가 주는 느낌의 다양함과 함께, 그의 글씨에 관심을 갖는 계층의 다양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용어를 선택하는 것도 결국은 세계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민중서예’라는 용어를 쓴 조희연의 경우 조희연이 갖는 민중 지향적 세계관을 거기에 투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다른 여러 명칭 가운데 ‘어깨동무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그 서체의 특징을 설명하는 임규찬(1957~)의 경우도 그 용어가 주는 연대의 특성을 선호하는 취향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비슷비슷한 개념의 용어들인데 이렇게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그 용어가 가진 각각의 뉘앙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울림체’, ‘협동체’, ‘연대체’ 등이 그 약간의 차이로 인해 용어를 선택해 쓰는 사람의 생각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개념이지만 ‘협동’과 ‘연대’가 주는 어감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하게 붙여진 이름들이 각각 특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인데 이는 신영복 한글 민체의 다양한 미감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영복의 민체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어려움은 우선 적극적 지지와 옹호의 글만이 있을 뿐, 비판적인 글이 없다는 점이다. 신영복 서예에 대한 옹호의 글은 대체로 기존 서단 내에서가 아니라 서단 밖에서 이루어졌다. 신영복의 한글 민체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는 현상을 볼 때 서단의 침묵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영복의 글씨에 대해 침묵하는 이유 중 하나는 평가할만한 글씨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다 문제가 있다. 평가할만한 글씨가 아니라면 그러한 글씨가 왜 그렇게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고 이는 예술과 사회의 밀접한 관련성을 볼 때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경우 이는 서단의 폐쇄적 성격과 관련해서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신영복의 한글 서예의 경우 그것이 권력의 힘을 빌리거나 제도적 틀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실로 한국 서단이 스스로를 대중들과 괴리시키는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본 장에서는 서예 관련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신영복 서예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서예 평론가 정충락(1944~)은 신영복의 좌경 의식 때문에 서단에서 그에 대한 거론을 기피하는 면이 있다는 점과 한편으로 ‘중국 법첩을 공부한 이른바 정통파들이 신영복의 글씨를 사이비로 본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통파에 대해서 정충락은 ‘사대주의적 관점’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영복 교수 글씨는 예술성이 있고 독창성도 있다. 나름대로의 오리지날이 확보됐다. 다만 약점은 운필의 리듬과 운묵의 묘를 제대로 못 살리고 있는 것이다. 조형 감각이 뛰어나고 일찍이 자기류를 만들어냈다, 등장하면서. 신영복 교수는 누가 뭐라하든간에 내가 이 글씨로 내 마음을 끄집어낸다는 그 주장이 분명하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진정한 서예술이다. 지금 어느 단체에서 된장국 글씨를 모으고 있는데 내가 거기 첫 번째로 추천하려고 하는 게 신영복 교수 글씨다. 우리가 왜 <광개토대왕비>를 좋아하는가 중국의 어떤 서예에도 그런 서예 글씨가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닌가.79)
운필과 운묵의 약점을 지적하면서 신영복 글씨가 가진 독창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토착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적극적인 옹호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단이 신영복 서예에 대해 말이 없는 이유 중의 하나로 ‘서단에 우리 글씨가 없는 문제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신영복 서예를 ‘예술성보다 민중성’으로 봐야 한다는 손병철은 그의 글씨가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의 ‘풍상의 필획’이 있다면서 ‘書如其人의 전통에 닿아 있다’고 말한다.
신영복의 글씨는 서여기인의 전통에 닿아있다. 그러나 신 교수의 글씨를 예술의 잣대로 높이 평가할 수는 없다. 예술성보다 민중성에 가깝다. 서법을 익히거나 매이거나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를 중심에 둔 서예라기보다 대중성(민중성과 같은 개념으로서)에 가깝다. 그것은 대중들의 특성이 반영된 것인데 이성이나 이론보다 대중의 직접적 이해와 감성에 쉽게 반응하는 글씨이다. 시대성과 민중성이 있고 필획에 생동감과 힘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80)
‘書品과 人品의 일치를 통해 독창적인 개성이 드러나 있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결함이 있다’고 본 부분은 정충락의 견해와 일치한다. ‘시대성과 민중성’을 강조한 것은 뒤에 살펴볼 사회학자 조희연이나 역사학자 한홍구가 본 관점과 유사하다.
‘대중성이 없는 예술은 설자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신영복과 의견을 같이한 정현식은 신영복의 글씨가 디지털 폰트화한 사실을 주목하면서 서민적 특성을 가진 글씨로서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고 말한다.
글씨의 평가는 극히 주관적이겠지만 그의 글씨는 우선 따뜻한 느낌이며 못난이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의 뒷골목의 모습과 못난 종지들이 어우러져 있는 시골스러움이 살아있다. 또한 이 시대의 요구와 민주화 투쟁이라는 그의 삶을 어느 정도로는 담아내고 있다. 기존 정통 서예가들의 작품은 자기의 짙은 개성이나 자기의 색을 너무 강조한 결과 대중성을 요구하는 폰트로서는 많은 문제점이 나타난다. 글씨는 수용자의 입장이 고려되어야 한다. 예술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면 그저 자기의 만족이며 공허한 몸짓이다.81)
정현식은 신영복의 글씨가 디지털 폰트로 개발되게 된 주된 이유가 ‘실용성’에 있으며 그의 글씨가 주는 ‘비정형성의 정형’이 이 시대의 다양한 삶의 양식과 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 있는 이동국은 서예계와 일반 대중들의 문화적 기호를 동시에 생각해야하는 입장에서 신영복 서예를 비교적 자세히 분석했다. 그는 우선 신영복의 글씨가 궁체에 갇힌 우리 서단에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울러 그는 신영복 글씨의 대중성과 학문적 깊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감옥에서의 오랜 연마와 고민을 통하여 새로운 서체를 탄생시킨 것에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서예가는 글씨만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동시에 시인이고 사상가다. 역사적으로 그랬고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쇠귀의 붓글씨의 마력은 바로 자신의 삶으로부터 배태된 이러한 내용들을 쇠귀체에 담아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너무나 쉽고도 너무나 어려운 말이지만, ‘글씨는 그 사람이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것이다. 쇠귀의 붓글씨는 정신이다. 조형이전에 그의 철학이 문자조형과 내용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처음처럼’은 바로 신영복 그 사람인 것이다.82)
신영복이야말로 진정한 서예의 길을 가고 있다는 평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성주표, 조병호 등을 통하여 한문 서체를 공부한 과정이 정통의 맥에 닿아있음을 환기시키며 ‘보통 글씨와 다른 개성의 발현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정통의 힘이 더 근본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신영복이 ‘우리시대 어느 서예 대가도 따라가 못하는 글씨에 대한 대중적인 인지도․영향력․시장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과 ‘신영복의 모습에서 오히려 조선시대 道學의 여사로서 아마추어이면서도 프로 서화가들과 다르며 ‘遊於藝’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쳤던 문인 사대부나 선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다음은 신영복의 독특한 ‘서체는 개인과 역사가 합작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학자 조희연의 글을 보자.
무기수 신영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가혹한 역사적 희생 과정을 통해서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시린 샘물’과 같은 두 가지를 들고 우리에게 나타났다. 하나는 우리의 역사, 현실, 삶, 인생에 대한 신영복만의 독특한 사색이며, 다른 하나는 ‘신영복체’라고 불리는 신영복만의 민중서예이다…그것은 무기수 신영복 속에서 만들어지고 조탁된 것이다. 20년의 역사적 희생이 개인에게 강요한 고난에 한 인간이 응전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83)
신영복 서예와 개인의 삶 그리고 역사의 관련성을 짚어내고 있다. 신영복 서예의 탄생이 사회적 역사적 상황과의 관련성에 의해서만이 해명될 수 있는 것과, 그 결과 나타난 신영복의 서예의 역동성의 역사적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임규찬은 신영복의 글씨를 ‘일단 획의 굵기에 변화가 많으며 힘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느낀다. ‘매의 骨氣’나 ‘곡선의 부드러움이 힘을 감싸고’ 있다거나 ‘연한 것이 강한 것을 품고 있다’는 느낌, ‘정지의 상태보다는 동작의 상태가, 그러나 과도히 움직이지 않는 자연스런 율동의 상태가 신영복체의 妙’84)라고 본다.
역사학을 전공한 한홍구(1959~)는 신영복의 글씨에 대해 서예사적 의미를 거론하고 있다.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서예의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한 그는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85)를 이룬 글씨로 평가했다. 평가의 객관성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사회 변화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역사학자의 판단이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지적이다. 서예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서예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학자가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씨 자체에 대한 이러한 평가와 함께 궁체와 다른 서체의 등장을 주목한 이동국의 발언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글 중에서도 소위 민체와 같이 ‘작가의 개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글씨를 쓴다는 것은 궁체 작가에게는 금기사항이나 내지 불문율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 현실에서 신영복의 시도는 돋보인다는 것이다. 궁체가 ‘한글의 전부일 수도 없고 전부이어서도 안 되며…궁체는 단지 글씨의 다양한 서체 중에 왕실의 삼엄한 법도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글씨일 뿐’86)이기 때문에 새로운 글씨의 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를 신영복이 달성했다는 판단이다.
기존 서단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신영복 글씨의 예술성과 작품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반면 독특한 개성을 인정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 신영복 글씨에서 민중성과 역사성 그리고 역동적 힘을 읽어내고 이에 대해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양쪽 모두 민중성과 시대성을 읽어내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뉘앙스에는 차이가 있다. 예술성이 낮다고 보는 사람들은 민중성이나 시대성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예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결국 서예로서가 아니라 시대적 특징이 반영된 자가 서체로 보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시대성과 민중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경우 예술성을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이들의 경우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V. 결론
본 논문은 신영복 서예술의 세계를 시대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그의 삶과 사상이 한국 근현대사의 산업화 민주화 과정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을 바탕으로 그의 서예 활동이 사회적 발언의 성격을 가지고 전개되었다는 것과 그에 걸맞는 서예 형식을 탄생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하였다. 이를 위해 그의 서예 작품의 내용과 기법을 분석하고 예술과 시대 상황의 상관관계를 조망함으로써 예술이 어떻게 시대정신과 遭遇하고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발전되어 가는지를 살펴보았다.
2장에서는 관계론적 사상을 중심으로 한 신영복의 예술론이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개조하려는 리얼리즘 예술론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예술을 인간학이라고 보며 예술은 사람의 일부이자 그 사람이 속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할 때 진정한 예술이 된다고 본다. 그는 감옥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남다른 학서 과정을 거치면서 궁체가 지닌 귀족적 감수성과는 다른 미감을 지닌 새로운 한글 서체를 모색하게 된다. 서민적 체취가 배인 글씨의 형식 미학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신영복은 어머니의 편지 글씨를 바탕으로 마침내 서민적 감성을 담은 새로운 서체를 탄생시키게 된다. 그는 그 속에 고통 받는 민중들의 요구와 서정을 담아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걸맞는 새로운 서체 형식을 탄생시킨 것이다.
작품 내용과 형식을 분석한 3장에서는 신영복 서예 활동의 중요한 목적이 예술을 통한 사회 참여라는 점과 아울러 서예 기법의 특징을 분석하여 운필, 장법, 결구 등에 역동성과 변화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변혁의 감수성이 반영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는 작품의 내용 속에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던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과 민중적 요구를 담고자 했다. 박노해, 신경림, 신동엽, 김지하 등의 글을 작품화하여 거기엔 노동해방, 통일, 민주주의 등의 사회적 발언과 메시지를 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이 가진 사회 변혁에의 열망을 서예 형식으로 표현하였던 바 이것이 바로 그의 한글 민체이다. 그는 한글 서예의 새로운 형식 미학을 통하여 궁체의 안정적 미감과 대비되는 변화성, 역동성을 연출해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한 작품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작품들에서도 모두 다른 획과 선을 구사하려는 작가적 의지로 연결되고 있다. 그는 획과 결구, 장법 등의 전통적 서예 기법 속에 새로운 미감을 담아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획의 굵기와 진행 방향에 변화의 특성을 최대화하고 있는 바, 자음에서 ‘ㅇ’과 ‘ㄹ’에서 기존 한글 서예가 시도하지 않은 변화를 주고, 모음에서 가로획과 세로획의 기울기를 변화시키거나 곡선의 흐름을 주어 역동적 미감을 형상화하였다.
4장에서는 신영복 한글 민체가 일반 대중들에게 확산되고 있는 현상과 신영복 한글 민체의 탄생 배경이 된 사회 역사적 상황을 검토하였다. 신영복의 작품들은 이미 책의 제호, 비문, 상품 로고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확산되어 가고 있는 바 이는 그의 서예적 감수성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신영복의 남다른 이력과 학문적 깊이가 그의 글씨에 대한 선호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신영복 서예의 독특한 미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서단 안팎의 평가를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70-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였거나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그의 글씨는 하나의 모범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으며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예술성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서예 관련 인사들도 신영복 서예가 가진 토착성과 시대성 대중성의 특징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품과 인품의 일치를 보여주는 그의 서예 활동이 기존 서단에 주는 시사점이 있으며 우리 전통의 맥을 잇는 한 특징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이룩한 서예적 성취는 그의 이론과 사상 그리고 이론을 이론에 머물게 하지 않는 치열한 실천의 결과물이자 동서양을 아우르는 학문적 蘊蓄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그가 이룩한 서예 미학과 형식은 한국 서예가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다. 리얼리즘 서예술, 또는 민중적 서예미학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길은 신영복이 현재 진행형으로 가고 있는 길이며 미완의 길이다. 그가 한국 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어떻게 열어 나갈 것인지 지속적인 관심과 주목이 필요하다.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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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감옥으로부터의 인간개조」, ''한겨레 21', 2006. 6. 22.
<도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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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2> 처음처럼 |
<圖3> 박노해 시 ‘눈물의 김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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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4> 리영희 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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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5> 한솥밥 |
<圖6> 바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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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7>너른 마당 |
<圖8> 샘터 찬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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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9> 길벗 삼천리 |
<圖10> 녹두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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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11> 김지하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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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12> 장일순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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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17>여순사건 위령탑 |
<圖18>벽초 홍명희 문학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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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19>5․18 첫 희생자 이세종 추모비 |
<圖20>권종대 추모비 |
<圖21>서울시립대학교 학생운동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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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13>전라북도 金山寺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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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14>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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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15> 나주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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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16> 민주화운동 협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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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22> 달력, 글씨와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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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23> 달력, 글씨와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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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24>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圖25> 나무야 나무야 |
<圖26> 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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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27>더불어 숲 |
<圖28> 반일 그 새로운 시작 |
<圖29> 여럿이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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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30> 논어의 자치학 |
<圖31> 한강 |
<圖32> 희망의 인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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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33> 사람이 희망이다 |
<圖34> 우붕잡억 |
<圖35> 아름다움을 훔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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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36>민주 경희 |
<圖37> 시민과 세계 |
<圖38> 가족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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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39> 기억과 전망 |
<圖40> 사회복지대백과사전 |
<圖41> 충무공 이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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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42> KBS 다큐멘터리 ‘인물현대사‘ |
<圖43> mbc 드라마 ‘좋은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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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44> 오페라 ‘수천’ |
<圖45> 영화포스터 ‘황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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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46> 음료 ‘흑초’ |
<圖47> 소주 상품 ‘처음처럼’ |
1) 김은숙, 「신영복의 삶과 서예관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4.
2) 박병천은 「서예의 정의와 특성에 대한 고찰」(''논문집', 인천교육대학교, 1985, pp.219~248)에서 “중국에서는 書法, 한국에서는 書藝, 일본에서는 書道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된 현실”이라고 말한다. 신영복은 무게 중심을 ‘書道’에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객관적 용어로는 차라리 ‘붓글씨’라는 어휘를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붓글씨, 즉 서도라는 것은 서양에는 없는 예술 장르예요…서도는 동양의 관계론적 원리가 아주 잘 녹아 있는 장르입니다.(<프레시안> 창간 5주년 기념 특별 강연, 인터넷 폼페이지, <프레시안>, http://pressian.com, 2007. 11. 1.검색)”라고 그는 말한다. 본 논문에서는 일반적인 용어로 ‘서예’를 사용하되 문맥상 신영복의 삶과 서예활동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서도’와 ‘붓글씨’라는 어휘를 함께 사용하고자 한다. 신영복이 ‘서예’보다 ‘서도’라는 용어를 선택해 쓰는 이유에 대해서도 뒤에 가서 분석한다.
3) 신영복, ''강의', 돌베개, 2004, p.23.
4) 문강선, 「인고의 휴머니스트 신영복」, ''작은이야기', 이레, 1999년 1월호.
5) 신영복, 「封建社會의 解體에 關한 考察」,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65.
6) 조희연 편, '한국사회운동사', 죽산, 1990, p.83.
7) 신영복은 기세춘과 함께 '중국역대시가선집'(돌베개, 1994)을 번역 출간한 바 있다.
8) 인터넷 홈페이지, <더불어 숲> (http://www.shinyoungbok.pe.kr/work/withsoop/board/ view.php?id=writings&no=69) 2007. 11. 1. 검색.
9) 신영복․ 김경환 대담, 「더 높은 인간성을 향한 불안스럽지만, 확고한‘떨림’」, 월간 '말', 1996. 8. “제가 이러저러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저는 인간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의 전문화에 반대합니다. 생산을 위해서는 찬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을 위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종합적인 인간형이 바로 인간의 발전이자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창의성이라면 전문성과는 시원하게 결별해야 합니다.”
10)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88, p.234.
11) 문학․미술․음악 등의 예술 분야에 民譚․民話․民謠 등의 용어가 쓰이는데 이는 그 예술의 창작과 활용 주체를 구체화한 것으로 ‘민중 또는 서민이 만든 이야기, 그림, 노래’라는 뜻이다. 서예의 경우 ‘민중 또는 서민이 쓰는 글씨’라는 뜻으로 본다면 ‘民書’가 논리적인데 이것이 ‘민체’로 된 것은 ‘궁체’라는 말의 대비로 설정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궁체가 붓글씨를 지칭한다는 학습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민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연상 작용을 일으켜 ‘민중들의 글씨’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예에서 조선 후기 민중들의 한글 필사 활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민체’라는 말을 서예 용어화하여 정착시킨 것은 효봉 여태명(「한글 書藝 작품과 印章과의 관계」, 학술발표, 1994년-조동권 석사 논문에서 재인용)의 공로이다.
12) 신영복, 앞의 책, 1988, p.187.
13) 김은숙, 앞의 논문, p.12.
14) 신영복, '손잡고 더불어', 학고재, 1995, p.5. “정향 선생님은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께 사사를 받으셨으며 원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 백당(白堂) 현채(玄采)의 정통을 이은 분으로 일컬어진다.”
15) 하정화, 「朱熹文藝美學思想에 있어서 진·선·미의 관계」, 동양철학연구회, 2003, p.326.
16) 이상우, '論語에 나타난 孔子의 藝術思想探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89, p.78.
17) 신영복, 앞의 책, 1995, p.7.
18) 김창진, 「제국의 논리를 넘어, 새로운 문명을 향하여」, '신영복 함께 읽기', 돌베개, 2006, p.190.
19) 신영복, 앞의 책, 1988, p.86.
20) 신영복, '엽서', 돌베개, 2003, p.179.
21) 윤형덕, 「流配文學의 刑律的 考察」, '논문집', 충주대학교, 1976, pp.15~32.
22) 한홍구, 「신영복의 60년을 돌아본다」, '신영복 함께 읽기', 돌베개, 2006, p.55.
23) 이동국, 「‘처음처럼’-신영복 ‘쇠귀체’의 역설의 힘」, 以文學會 세미나, 2007. 10. 6. 서울. (http://www.shinyoungbok.pe.kr/work/withsoop/board/view.php?id=storyfromsoop&no= 16218) 2007. 11. 1. 검색
24) 신영복, 앞의 책, 1995, p.9.
25) 일제 강점기에 서예인들이 취한 태도에 대해 연구된 것은 없으나 송하경은 그의 저서 '신 서예시대'(불이, 1996, p.11.)에서 우리 서단이 일제하 암흑의 동토시대에 ‘친일적 서예’와 ‘항일적 서예’가 병존하는 기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친일 인물로 이완용을 거론했으나 ‘항일저 서예’의 실제 인물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이 벌인 전시회에 참여하였다는 지인들의 비판을 받고 이후 서도계와 인연을 멀리하였다’는 조병호의 입장을 ‘항일적 서예’의 범주에 넣기에는 소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6) 신영복, 위의 책, p.8.
27) 신영복과의 메일 인터뷰를 통한 확인(2007. 9. 26.)
28) 신영복, 앞의 책, 1995, p.12.
29) 어머니의 편지글로 신영복의 진술에 의하며 교도소에 영치하였는데 유실되었다고 하며, 유일한 글씨가 김은숙의 논문에 실려 있다.(김은숙, 앞의 논문, 46쪽)
30) 인터넷 홈페이지, <북데일리>, 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 316360&year=2007, 2007. 7. 15. 검색.
31) 이석표, 「한글 궁체 형성 과정 연구」, 경기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2, p.51.
32) 여태명, 「한글 민체의 자형미 고찰」, '글꼴, 2002', 문화관광부, 2002, p.27.
33) 신영복, 앞의 책, 2003, p.146.
34) 한홍구, 「감옥으로부터의 인간개조」, '한겨레 21', 2006. 6. 22. 제615호. (http://h21. hani.co.kr/section-021075000/2006/06/021075000200606220615026.html) 검색 2007. 11. 2.
35) 하승창, 「나를 성찰하게 하는 글과 말」, '신영복 함께 읽기', 돌베개, 2006, p.340.
36) 전인숙, 「신경림 시의 전개양상 연구」, 여수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4, p.61.
37) 공광규, 「신경림 시의 창작 방법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4, p.283.
38) 김성윤, 「신동엽 시에 나타난 현실 인식 연구」, 영남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3, p.1.
39) 김춘기, 「신동엽의 서사시 연구」,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 2003, p.33.
40) 신동엽, '신동엽 전집', 창작과 비평, 1982, p.67.
41)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 1990,
42) 김만수,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 나남출판, 2003, p.7.
43) 임동확, 「생성의 사유와 ‘무’의 시학-김지하 시세계 연구」,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4, p.9.
44) 홍융희, 「김지하 문학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1998, p.1.
45) 윤무한, 「신영복의 감옥 속에 들어온 현대사, 혹은 시대 뛰어넘기」, '내일을 여는 역사', 서해문집, 2007년 봄호, pp.181~200.
46) 신영복, 앞의 책, 2003, p.179.
47) 중국이 당·정부·군간부들의 관료주의·종파주의·주관주의를 방지하고 지식분자들을 개조하며 국가기구를 간소화한다는 명분으로, 간부들을 농촌이나 공장으로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고급 군간부들을 사병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기거하며 생활하게 하는 간부정책으로 1957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100.nhn?docid= 184923, 2007. 12. 8. 검색) 신영복은 역량이 강한 조직이 역량이 약한 조직을 향하여 손을 잡고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하방연대라는 용어를 쓴다.
48) 신영복․김명인 대담, 「이라크 전쟁 이후의 세계와 한반도발(發) 대안의 모색」, '황해문화', 2003년 가을호, pp.48~49.
49) 이동국, 앞의 글.
50) 신영복, 앞의 책, 1995, p.63.
51)인터넷 홈페이지, <북데일리>, 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 316360&year=2007, 2007. 10. 20. 검색. “예술이란 게 뭐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작가와 아득한 거리를 느끼게 하는 것, 그게 예술이 아니거든요. 사람들 사기를 떨어뜨리는 게 예술이냐, 그렇지 않아요. 인간에게 유익하고 봉사를 해야 하고. 그 시대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이 있어야 하고…공유하는 일이 필요하다.”
52) 신영복, 앞의 책, 2003, p.111.
53) 하승창․신영복 대담. 인터넷 홈페이지, <더불어 숲>, http://www.shinyoungbok.pe.kr/work/ withsoop/board/view.php?id=storyfromsoop&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221, 2007. 11. 1. 검색.
54) 여태명, 앞의 논문, p.39.
55) 신영복의 많은 작품들은 전시장에서 전시되어 유포된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 등이 원할 때 그때그때 써 준 것이 대부분이다.(신영복․오숙희 대담, 「어깨동무해 살고픈, 우리시대 선비 신영복」, 월간 '참여사회', 1996년 5~6월호.)
56) 이 작품의 부기로 자주 쓰이는 글은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자 어느 생각하는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이다.(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1996, p.29.)
57) 고영득, 「알칼리 환원수로 웰빙소주 어필」, '헤럴드경제', 2006.11.24.
58) 폰트 명칭 ‘J신영복_TT’로 디지털화한 신영복의 이 글씨는 (주)세일 포트마의 직지소프트가 한국 최초의 국한 혼용 폰트로 제작하여 시판중이다. 이 글씨는 디지털의 특성상 신영복의 의도가 온전히 반영된 것으로 보긴 어렵지만 신영복 서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상품 로고, 간판, 현수막의 글씨로 대중화하고 있다.
59) 정현식과의 인터넷 메일 인터뷰(2007. 11. 25.)
60) 인터넷 홈페이지, <산돌>, http://www.sandoll.co.kr/sandollweb/index.asp, 2007. 10. 7. 검색. 조선시대의 필사본 가운데 <구운몽>, <송강가사>, <여사서>, <옥원중회연>, <용비어천가>, 등의 10여종의 한글 글씨가, 현대의 서예가들 글씨 중에는 김충현, 김기승, 서희환, 이철경, 이미경, 장성연의 한글 서체가 디지털 폰트로 제작되어 시판 중이다.
61) 인터넷 홈페이지, <직지소프트>, (http://www.smfont.com/main/?doc=home.html) 2007. 7. 20. 검색. 신영복 서예는 국한 혼용으로 직지소프트사가 폰트화하였다.
62) 홍석중, '황진이', 대훈, 2006.
63) 인터넷 홈페이지,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7 05 01 1756331& code= 100100, 2007. 11. 19. 검색. 홍석중은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해방 후 월북하여 부수상을 지낸 홍명희의 손자이다. 신영복은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하여 제목 글씨를 썼다.
64) 윤무한, 앞의 글, p.198.
65) 김지하는 묵란를 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도록이 시판되고 있다.(김지하, '미의 여정, 김지하 묵란', 학고재, 2001.) 김지하는 무위당 장일순에게 붓 잡는 법을 배웠다(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2004.). <圖11>참고.
66) 최성현,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도판, 좁쌀 한 알', 도솔, 2004, p.32. “장일순은 원주에서 지학순과 함께 사회 정의 구현을 촉구하는 가두 시위를 주도했다…박정희 군부 독재의 부정과 부패를 폭로하며 한국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67) 인터넷 홈페이지, <한살림>, http://www.hansalim.or.kr/, 2007. 11. 1. 검색. 생태질서에 맞는 먹거리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생명 운동 단체로 1989년 설립되었다.
68) 신정완, 앞의 글. 같은 쪽.
69) 안은영, 「한국 현대사의 민중미술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 2003, p.3.
70) 김병걸, '민중문학과 민족 현실', 풀빛, 1989. pp.101~102.
71) 김정환, '문화운동론', 공동체, 1986, p.124.
72) 강만길, 앞의 책, 같은 쪽.
73) 한국역사연구회, '한국현대사 3', 풀빛, 1991, p.207.
74) 김정환, '문화운동론', 공동체, 1986, p.114.
75) 홍승연,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의 역사적 고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3, p.8.
76) 윤성혜, 「70년대 이후의 새로운 미술운동」,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92. pp.24~26.
77) 윤성혜, 위의 논문, 1992. p.6.
78) 안은영, 「한국 현대사의 민중미술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3, p.3.
79)정충락 인터뷰, 2007. 10. 13. 서울 정충락 개인연 구소. 인터넷 홈페이지, <더불어 숲>, http://www.shinyoungbok.pe.kr/work/withsoop/board/view.php?id=storyfromsoop& 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 no =16182) 2007. 11. 1. 검색.
80) 손병철 인터뷰(서울, 물파 아트 스페이스, 2007. 11. 23.)
81) 정현식 메일 인터뷰(2007. 11. 25.)
82) 이동국, 앞의 글, http://www.shinyoungbok.pe.kr/work/withsoop/board/view.php?id= toryfromsoop&no=16218. 2007. 11. 1. 검색
83) 조희연, 「그의 몸에 새겨진 한국 현대의 역사, 그의 몸이 뛰어넘은 한국 현대의 역사」, '신영복 함께 읽기', 돌베개, 2006, p.77.
84) 임규찬, 「사색의 산책이 펼치는 언어의 숲」, '신영복 함께 읽기', 돌베개, 2006, p.90~91.
85) 한홍구, 앞의 사이트.
86) 이동국,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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